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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는 잔과 도구들을 뒤치닥꺼리 하여 상위에 펼쳐 놓으니 저마다 자연스럽고 평등하다.  그림 그리느라 상위에 편 흰 종이위에 쓴 사의(寫意)와 빙의(憑依)가 현상에서 닮은 듯 하지만 하나는 한마음의 현재가 되어 둘이 모두 존재로서 조화루운 반면, 하나는 상대를 욕망으로 간음하여 하나인 듯 하지만 죽음을 강요하는 배반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가 자연스럽고 평등해야 하는데 사람의 배후에서 빙의(憑依)로 이간질하는 鬼의 목적은 사람과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사이비(似而非)의 의미가 도리(道理)를 버리고 비현실에 산다는 것이겠지요.

도리(道理)를 버리고 비현실(非現實)에 살려면 의식을 비현실을 누빌 만큼의 능력 아닌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태생부터 의식(意識))이 불구(不具)로 태어나 타인의 의식에 전이하는 빙의(憑依)를 통해 자신들에게 결여된 정신(精神)을 타인에게 의지하여 정상인 수준의 삶으로 사는 존재인 귀()가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퇴행의 돌연변이 의식(意識)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전이하듯이 타인의 몸과 의식에 전이하는 빙의(憑依), 정신이 결여된 존재이므로 초월이 불가능한 한계를 집착하는 현실의식의 힘으로 기운을 부리는 능력을 키운 다음 수행자 행세를 한 경우입니다. 군국주의 당시 검선일여(劍禪一如)에서 생사일여(生死一如)로 확장 해석한 타락한 정신으로 을 왜곡한 승려들의 배후 역할이 사이비의 전형입니다. 타인에 대한 살육과 할복은 삶도 죽음도 넘은 초월자의 정신으로는 절대 할 수 없으며, 초월의 경지를 넘지 못하고 욕망의 집착에 의해 돌연변이 의식을 쓰는 들의 장애(障礙)현상일 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이비 문제는 의 성질로 사는 김영태와 그의 족속(문중)의 문제입니다. 이들의 문제가 심각하여 스승 아라가비 님을 비롯한 神性의 수행자(修行者)들이 이를 알고 약 25년 여째 대치하며 확인하는 중입니다.

이처럼 확인하는 중에 들이 폭력의 콤플렉스로 식민지 세계를 구조화하기 위하여 사람과 인류사회에 대하여 장애(카르마)를 거는 행위가 탄로 나고, 이들에 의해 식민화로 고착된 영역에 대하여 그들이 설치한 콤플렉스(비현실)의 옥죄는 강제성을 늦추어 살리는 것을 또다시 방해할 목적으로 우리 禪家수행단과 인류 세계에 대하여 毒氣冷氣로 장애를 거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김영태의 일족이 평소에 미리 빙의(憑依)를 통해 신천지교와 같은 특정종단의 의식을 그들도 모르게 무단으로 조율하며 강제로 운용하다가 현재와 같이 의 족속이 비상시에 계획적이고 구체적으로 교묘하게 자신들의 범죄를 대신하는 희생양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의 목적은 절대 사람과 공존하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