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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茶談, 세 신선과 나눈 이야기 - 茶와 르네상스
意차원의 경계는 지배방식의 하나로 쓰이면서 전체주의적 전체주의적 경향인 것이 증명된다. 현재 선가(바나리)의 意차원의 점유방식이 끼치는 한계, 즉 인간과 신관(세계관)의 변화에 따른 철학과 수행이 배제되는, 서양의 중세 암흑기와 닮은 시대로 접어드는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역사는 오래 후에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하여 사람들이 반성하게 되겠지만 단기적인 주변부의 현상을 핑계로 스스로를 정당화 하지 않아야 하겠다.
서양은 5C경 로마공화의에서 내면의 수행을 금지하고 교회법을 따르도록 한 예가 있었고, 이는 중세 암흑기를 거치면서 인본에 목마른 사람들의 마음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하였다. 르네상스는 사람들 스스로 자기 내면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었으며, 이는 신플라톤주의와 신비주의적 전통 등을 통하여 수행과 복본하려는 의지의 한 단면이었다.
이 커다란 흐름이 결국은 다시 한계에 부딪치며 매너리틱 해 지고 바로크와 로코코 그리고 낭만주의적인 의식의 변화를 거치게 된다. 심원한 심층의식 차원에서 감성 등의 표층의식 차원으로 인간의 사유가 바뀌는 과정에서 유럽의 제국주의가 생겨나는 것이다.
의, 식, 주와 사고행위까지 거의 서구화 된 우리의 삶의 본질이 본성 보다는 의식에 바탕을 두고 감각차원에서 사유하며 사는 우리느 아직도 본성을 망각한 삶이며 스스로를 변혁하여 진정한 나를 되찾아야 하는 새로운 르네상스의 시대인 것이다.
우리의 茶가 심원의 지평으로 열게 하는 물건이란 생각을 해 본다.


胡蝶
-夢覺一如



자오선 살짝 기울어 어지러운

꿈속으로 찾아오신 아버지

나를 움켜쥐려 손을 내미시네

나를 향해 내민 손가락

마디 하나 끊어 삼키고 날아올랐네

세상에 온통 차오르는

사월의 봄 물결 속에서

은사시나무 위에 걸린 까치집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흔들리네

매화가지 하나 꺾어 오신 아버지

병에 꽂으시고, 나비하나

방안으로 날아드네



세상에 마주하며 존재하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표현한 십 년 전, 꿈과 현실 사이의 틈을 욕망과 반성을 통하여 건너던 때의 내 자의식의 모양이다. 나는 이 때 병이 든 몸과 마음을 차와 명상을 통하여 스스로 회복해 가는 시기였고, 아버지와 차는 심원의 현실로 나를 여는 지평이었다.

그러나 십여 년의 수행의 지평을 통해 지나고 오 년여가 흐른 지금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빙의憑依 속에서 사경을 헤메신다. (이 글을 마무리 하는데 같이 하던 세 신선 중 똥을 싸던 신선 마루달이 '네 命에 흔적을 남기고 간다. 너의 아이들에게도 같은 흔적을 남긴다.'는 말을 하고 간다. 명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명치에 찌릿한 신경의 통증과 함께 오그라드는 상태를 남기며 이는 외부의 행위인 빙의憑依현상 중 하나인데 이런 경우 심신이 허해지며 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글을 막 마치는데 동생 진용이의 전화다.
'아버지가 임종 하셨어요.'



"문자화면에 수신자 세 분 중 스승 아라가비 박현 님과 서해진 선생 등 두 분은 실제로는 나와 내 집안을 살해하려는 김영태의 음모와 행위를 확인하고 저지하려는 분들이며 당시 상황 중 아버지의 운명하는 상황을 김영태의 행위를 스승인 아라가비 님의 통찰의식(우주 의식)안에서 행하게 되므로, 현상을 잘 모르는 경우 오해 소지가 있고 나 또한 의식(심리차원)에서 소통하는 상황이라 스승께서도 김영태와 의식이 동시성을 유지하는 것이 마치 같이 범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확인하기 위해 발송한 휴대전화 문자에 경어를 쓰지않고 속어를 썼습니다. 당신의 신체가 김영태에게 훼손당하면서 까지 나와 나의 집안을 살리려고 같이 해주신 스승께 그리고 서해진 선생께 죄송한 마음과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스승과 서해진 선생은 김영태(마루달)의 심리를 이용한 빙의(憑依)법죄의 교활한 특성(김영태의 빙의를 통한 의식교란으로 자신과 공범으로 여기게 만드는)상 마지막에 고발조치 하려는 분들 입니다. " 2018. 1. 7 추가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