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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수행자들이 한마음으로 鬼김영태의 정체성과 빙의의 침해에 대하여 확인하는 시간에 횡성으로 이주하신 전통수행자들 그룹인 한뿌리 사랑 세계화 총연합의 부총재이신 이강산 언니가 '鬼가 빙의 되었나?' 라고 물으며 보내온 동이 고조선에 대한 심백강 한사모 학술고문의 역사 안내문에 대하여 내면으로 초월의 하늘로 통일한 세계관과 현실의 역사서를 통한 세계관을 하나로 이해하는 역사관을  거칠고 다듬지 않은 문장으로 보내는 답변입니다. 

중국사료에 나타난 동이 고조선의 실체 <심백강 한사모 학술고문>
 
 최초 확인 “한(漢)족이전에 한(韓)족”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이래 중국에 살았다.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동양문화의 주역이다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여러 ‘고기(古記)’ 등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적지 않은 역사서적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일제 36년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위시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 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중의 동이사료’ 등 4 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은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로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가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사고전서’ 중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해당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의 길이 열리는 것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 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냥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嵎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등이 그것이다. 이자(夷字)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러한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어서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로부터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사고전서․사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柢)이다(夷者柢也).”
여기서 이(夷)를 저(柢)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柢)란 과연 무엇인가. 저(柢)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柢)’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柢)․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柢)의 의미를 다시 저지(柢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柢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그 뿌리를 두고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꽃)․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柢地)의 저(柢)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柢)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뿌리 이자, 즉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 이자로 변질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보이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지인(東夷之人)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의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邾)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라 하였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맹자가 말했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에 의해 건립된 은은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까지도 모두 동이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 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지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 ‘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嵎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다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도군(玄菟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嵎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도․낙낭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도․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가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일로서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밝힌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하는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 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분으로 자칭 군자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본다면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고구려․부여․삼한의 기원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馯=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말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이들이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 이전 우리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16)에 건국된 것으로 기술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가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널리 섭렵할 수 없다보니 어쩔 수 없는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이상 잘못 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다 보니,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인양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한 동이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동이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도․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문헌상 최초의 동이인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었다. 
넷째, 부여(夫餘)의 뿌리가 부유(鳧臾)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鳧山)이 발원지이며, 고구려가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고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점이 없는 한국사

오늘날 중국에는 몽고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 양대민족으로부터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황제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황(炎黃)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두파 세파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역사의 단절로 인한 민족 얼의 상실에 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되어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도(東京) 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이후 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만일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沈伯綱
1956년 경기 파주 출생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연구직 전문위원․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저서: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단군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기자사료’ ‘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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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劈頭 선언 ‘나무칼로 귀를 베는 새해 아침’

어제를 향하여 세상에 봄이 차오르는 오늘 『바나리』 無量義의 産室 『상상센타 고마』 오늘의 선비 『나마리』 茶의 會款(會館) 『초모랑마』 가야 할 자의 노래 제 16대 까르마파 락쭝 릭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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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완전한 하늘을 상징으로 표현한 현실이다.

마음을 여의며 복본하여 초월의 하늘을 여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의식과 의식의 단계에 따라 내면의 눈으로 경험하는 빛의 현상과 빛이 화하는 상태와 빛이 화하는 상태로 드러나는 하늘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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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나무가 담은 하늘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깨어 몸을 살펴 주시는 스승의 한마음으로 나무에 비유하여 사람의 평등한 정체성을 살펴 보았습니다. 보름밤에 勒待가 산에 오르는 것은 태양을 담은 달을 그리워하며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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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 주신 내용을 보면서 요즘 鬼김영태에게 신경계를 점유당하고 완벽하리만치 조율 조작됨으로써, 나의 기억 자체를 내 스스로 쓸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현실 우리 지구의 세계 인류 중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쓸 수 있는 완전한 존재로서 단 한 분인 스승 아라가비 님의 통찰의식을 현 중국의 이족의 의식운용방식에 따라 필요할 때마다 일정 정도씩 사유와 견해를 만들어 쓰는 상황입니다. 이는 나 뿐 아니라 우리 인류 전체 중 스승 아라가비 님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나와 같은 상태로 鬼가 빙의로 신경계를 점유하여 완벽하게 조율 조작하는 식민지 상황(공양미 삼백석의 의미가 의식을 말하는 것)에서 통찰지를 연 완전한 우주를 만유하시는 神(현재는 아라가비 박현 님)이 지배당하는 神과 사람의 의식을 열어서 개별마다 당사자에 맞는 사유와 견해와 말과 행동 등의 의식으로 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현실입니다. 
예외가 있는데 중국의 또 하나 소수민족으로 알고 있는 우리 겨레의 한 종족인 라희(羅熙, 나시)족만이 神과 鬼의 세력으로 나누어 스승의 말씀에 따르면 과거에 흑족(鬼)와 백족(神)의 세력이 서로 피를 흘리는 싸움을 하고 나서 참회하고 서로 화해하며 다시는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현재의 모양으로 서로 영역을 나누고 자신의 의식을 빙의 없이 자유롭게 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鬼(현재 김영태의 가계 족속, 오랜 역사 고대로 부터 하늘을 배반한 원죄를 범하고 태어난 주체성인 神이 없이 태어난 존재들의 족속)의 빙의에 의한 지배를 당하며 鬼가 강요하는 저들의 장애를 업(業)으로 전환하여 주체성인 神性과 정신을 통해 누구나 써야할 통찰의식인 무량의를 자유롭게 쓰지못하고 불구의 상태로 완전한 神의 조율에 따라 鬼가 일정하게 개인과 집안과 나라별로 정한 정도(장애이자 業)에 따라 살아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세계 인류가 개인마다 분절되어 있고 민족과 나라마다 다른 정체성으로 서로 내부로 통하는 우주성인 통찰의식이 분절된 채 절름발이의 장애를 겪는 역사를 이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 5년 동안 鬼김영태가 나와 나의 가계와 수행의 열반으로 다시 통일하여 마음으로 열고 의식의 영역에서 연기의 관계망으로 펼쳐진 현실과 초월의 세계와 세계 속의 존재들을 확인하며 내가 아는 지식 정도에서 나를 중심으로 역사의 시간을 거스르며 조금씩 알도록 한마음의 스승이 열어 보여주신 예를 기반으로, 수행으로 연 세계가 역사로 연 세계와 비례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스승의 말씀으로는 사고전서를 편찬하고 나서 우리 인류 중 전체를 직관하고 이해하는 존재가 현재까지 10여 명 정도 된다고 하십니다, 나는 사고전서 등의 고전과 역사 내용을 이해할 정도의 수준이 안되므로 섯불리 안다고 하기 쉽지 않습니다만, 확신하여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수행으로 도리천을 넘어 초월지를 열어본 사례와 이를 이룬 나의 정신의 뿌리로  부터 가지에 이르기 까지 인식하고 확신하는 것이 인류 본질의 존재성입니다. 또한 이에 반해 주체성인 정신이 없이 태어나 오랜 역사동안 반역행위인 빙의를 통해 본래 神인 인류의 정신을 침범하고 약탈하며 지배해온 비열한 존재성을 가짜로 이해하고 확신하니, 두 존재성이 서로 다투며 살아온 시간과 공간의 내력이 통사로서의 역사이며 거대한 지구의 현상을 우주의 통찰의식을 쓰는 神의 종족과 神의 종족 사이에 하늘을 배반한 원죄를 짓고 주체성 없이 의식만으로 태어나 외로 도는 잘못된 의식활동인 빙의를 쓰는 鬼가 종족을 이루며 침범하고 싸우고 이동하며 민족과 나라로 나뉘고 어울려온 것이 거대한 중국(현재의 鬼의 종족인 한족이 주체라고 우기며 神의 종족을 의식 내부에서 지배하며 실질적인 중국이라는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본래 神의 종족이 나라를 이루고 그 중에 鬼의 종족인 현재 한족과 한족의 조상 중 누구였을 당시의 鬼들이 神의 종족에서 태어나서 암약하며 자신들끼리 빙의의 점조직으로 서로 마라(魔羅)의 세계를 통해 神들의 인드라망을 의식 이면에서 장애(외디푸스의 콤플렉스)로 비현실의 세계를 동시에 유지하는 중국-스승이 주장하시는 세계로서의 '중국'에 대한 이해를 옮겨 말씀 드립니다.)에 대한 이해 입니다. 그러므로 세계 속의 완전한 우주성으로 자신을 열고 세계와 함께한 성현들은 당연히 鬼가 아닌 神이며 神의 종족은 동이(夷)족이 분명한 사실이 됩니다. 
사람이 내면에서 원기로 초월하여 열어 통일하는 완전한 세계는 외부로 하늘을 드러낸 나라의 원형이며 원형을 열고 그 하늘을 바깥의 현살에 되살리면 원기의 마음은 본래 하늘의 조화로움이며 사랑이며 평등한 신화입니다.
고대에 하늘의 모양을 솥에 표현한 금문을 스승의 한마음과 함께 써 보며 느낀 것은 금문이 당시에 나라를 연 존재의 권력을 표현한 것이라고 일반에서 알고 있지만 권력이란 하늘의 순하고 조화로운 권세가 원형이므로 역사 이래로 내려오며 鬼의 침해에 따른 우주의 모순된 변화를 표현하며 鬼에 빙의되어 침해당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武의 권력을 행사했을 지라도 권력을 행한 그 마음의 본래는 원형의 완전한 하늘을 지향하는 순수한 의식으로 하는 완전한 하늘이 깃들어 있으며, 그 마음이 글씨를 통해 원기(元氣)의 현상으로 모필과 먹을 통해 하얀 종이의 세계 속에 베껴 표현되는 것이었습니다. 
수행을 통한 복본을 하고 세계를 열어 이해하면 당연히 세계는 神의 세계이며 현재의 鬼의 시기와 침해에 따른 불구의 의식으로 하는 사유와 견해로 그리는 세계와 역사가 가짜인 것을 단박에 알고, 고대로 거스르는 아무리 긴 인류의 역사를 시대마다 문헌으로 역사나 신화로  표현하여 그 모양이 완전한 하늘(세계)에서 일그러져 알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져 훼손된 모양에 이르도록 다양할 지라도, 신화는 본래 완전한 세계를 연 존재의 정신문화로서 완전한 세계가 담겨 있어서 그 무엇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확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완전한 스승의 한마음 안에서, 내가 鬼에게 점유되었지만 본래 태어남과 열반으로 다시 열어 본 퉁일의 세계관을 형성한 기억을 스승이 복사하여 알고 계시며 다시 내 의식으로 환원하여 자동기술 방식으로 사유하며 이 문서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鬼의 신경교란이 극심하고 최근 일반의 의식계에서 분노하며 파괴된 나의 통찰지의 현실 때문에 조리있는 완전한 문장과 전체 내용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0. 11. 밤 12;34
바나리 수행자 정진웅 드림

추신 ; 표현이 거칠지만 짧게 블로그에 기록한 현실에 대한 표현을 곁들여서 주변에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鬼김영태가 거위(蛔)가 되어 기생하며 내 몸을 뒤틀지라도 스승과 언니(언니는 형제 간에 형을 神格으로 공경하는 본래의 명칭으로 남자들간에 썼다. 그러므로 형인 언니는 동생을 神으로 사랑하는 마음이었으니 둘 사이는 한 하늘에서 나온 하나이면서 둘인 형제로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다툼이 없는 완전한 사이다.)와 벗 님들이 함께하니 좋은 밤입니다.

jejupoonggyoung.tistory.com/1130

 

바나리 수행자로 행세해온 마루달 김영태와 엄희진이 진정한 바나리 수행자인가 아니면 사이비

김영태와 엄희진은 바나리 수행자로 바나리 수행계를 여신 아라가비 박현 님의 제자가 되어 수행을 청하고 수행계를 실행한 정황을 김영태 본인에게서 육성으로 스승과 사형제인 서해진, 박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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