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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길을 따라 시간의 집에 사는 시간에게로>                당신은 구부러진 시간이야 당신이 째깍 이는 바늘로 뜨개질 하고 있을 외딴집으로 가는 오솔길 어귀에서 당신의 집 한쪽을 들어 올리는 기울어진 중력을 보며 나는 웃고 있어 쪽문을 열고 들어가 예각으로 기울어지며 기다리는 당신에게 둔각으로 쓰러져 안기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지 길 옆 노송들이 나를 보며 미소 짓네 나의 상상이 조금은 귀엽고 琥珀 속에 갇혀 바깥으로의 표면에 여린 손을 대고 내다보던 어린아이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끝을 모르는 길의 바깥에서 당신을 만나러 온 거야 점선으로 지어진 두 개의 집에 들어 살다가 형상 없는 당신이 못내 그리워 이제 곁에 와서 반가운 눈물을 쏟네 노랗고 투명한 나의 안에서 손에 잡힐 듯 느껴지던 당신을 이제야 만나게 된 걸 보면 아마도 당신은 구부러진 시간이지 싶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밟으며 돌고 돌아서 온 거지 그래! 당신은 구부러진 먼 오솔길인 거야     (2011년)  

https://news.v.daum.net/v/20191112040013203

 

호박(琥珀) 속 곤충서 9천900만년 전 꽃가루 매개 확인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백악기 중기인 약 9천900만년 전 송진이 굳어 만들어진 호박(琥珀) 속에서 꽃벼룩과(科) 딱정벌레와 꽃가루가 발견돼 곤충의 화분 매개에 대한 가장 오래된 화석 증거로 학계에 보고됐다. 이는 곤충의 화분 매개 증거를 5천만년 이상 끌어올리며 가설로만 남아있던 백악기 중기 곤충에 의한 속씨식물의 폭발적 증가설을 구체적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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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북방 유목민족의 수행에서 일어나는 초월 현상에서 대하는 존재성이다. 달빛이 비친 푸른 은빛 늑대는 스승이며 하늘이고 무량한 우주 의식이며 나의 대아(大我)이기도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벌레가 창궐하는 멧돼지를 퇴치하는 이야기 <모노노케 히메>에도 푸른 은빛의 늑대가 등장한다.

여기서 푸른 달빛의 늑대는 남성성의 대아(大我) 제우스로서 신()이자 스승이다. 또한 모노노케 히메는 여성성의 대아(大我) 비너스로서, 하늘인 스승과 한마음이 되어 귀()와 대응하는 여래(如來)로서 예수(禮數)이자 보살(菩薩)이다.

벌레가 창궐하는 멧돼지는 헤르메스(제피로스)로서 귀()이자 질병과 폭력을 일으키는 장애(障礙)인 악()의 근원이다.

 

현실의 멧돼지가 사람을 피하지 않고 고속도로와 사람이 사는 시가지에까지 접근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공수병(恐獸病)에 걸린 빙의(憑依) 현상이다. 사람이 귀(, 제피로스)에게 빙의(憑依, 강간)되어 음기(陰氣)에 침해당해 정령화(꽃의 요정, 클로리스) 되듯이, 돼지가 귀()에게 빙의(憑依)되어 독기(毒氣)와 냉기(冷氣)로 기경(氣經)을 점유하고 교란당한 상태이다.

https://news.v.daum.net/v/20191112193823364

 

"핏빛으로 변한 임진강.. 마을엔 썩은 냄새 진동" [밀착취재]

쌓아둔 돼지 사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빗물과 함께 유입되면서 강물이 붉게 변했다. 연천임진강시민네트워크 제공 “내 새끼 같은 돼지들을 마구잡이로 살처분해 마음이 찢어졌는데, 이제는 청정지역 물조차 돼지 핏물로 오염됐습니다.” 12일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돼지 살처분·매몰 작업으로 침출수가 임진강 지천으로 흘러든 경기 연천군 중면 민간인출입통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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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가축의 경우에 현재 우리나라의 공장식 축산은 귀()의 빙의(憑依)로 조작된 축산 방식이다. 감금과 고문의 상태로 키우는 식용 가축의 경우 귀()가 강요하는 빙의(憑依)에 따라 가축이 신경(神經)에 음기(陰氣, 냉기와 독기)의 침해를 받는다. 그러므로 음기(陰氣)에 서식하는 전염병균이 창궐하고, 그 대책도 대량살상의 참혹한 죽음을 강요하는데 실은 이 모든 과정이 귀()가 사회를 식민화하는 구체행위 중의 하나이다.

또한 애완이란 말에서 반려라는 말로 격을 올려서 동거하는 존재 또는 배우자로 대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하철역에 붙은 광고 포스터의 말처럼 펫이 사육하는 것에 따라 삶을 사는 노예로서의 사람을 요구하는 귀()의 사회의식 교란 행위도 일상이 되었다. 교묘하게 의식을 교란당하여 소외된 노숙자나, 배우자 대접받다가 버려진 애완동물은 귀()가 자신의 존재성인 가짜에 대신하여 거지로 전락시켜 폐기처분하는 제사(祭事)의 희생양이다.

근래 한 자치단체에서 실행한 각설이 축제는 거지(혼이 없는 가짜 존재)를 주제로 한 제사(祭事)의 하나이다. 사람인 자치단체 구성원인 사람이 주인이 되어 벗을 초청하고 혼연일체가 되어 나누며 즐기는 잔치가 아니라 귀()가 교란하는 의식(意識)에 따라 사람이 자신을 주인으로 하지 못하고 거지(물론 가짜 거지이지만)를 주체로 세우고, 가짜문화를 파는 장사꾼이 되어 벗의 주머니를 털어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현재를 잃어버린 비현실의 천박한 우상을 숭배하는 현상일 뿐이다.

축제라는 거짓말에 취하여 고급스러울 거라는 의식에 도취된 제사(祭事)는 현재에서 멀어진 사회에서 주인인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귀()에게 속아서 제물을 바치는 자위 현상이다.

물론 조상께 지내는 제사(祭事)인 차레는 하늘의 선물인 차()가 지닌 의미인 채움과 비움의 차와 레를 합친 말이다. 현재성을 지나쳤을 삶에서 낡은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마음을 채우며 조상의 고마움을 기리며 현재를 되찾는 잔치이다. 고대에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지냈다는 마차레는 채움과 비움을 통하여 참마음을 이루는 것이었으니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몇 해 전 김영태가 나에게 빙의(憑依)를 거는 존재인 귀()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인 줄 몰랐을 때, 잘 두는 바둑은 아니지만 서로 좋아하니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둘 다 수준이 비슷하면서도 포석은 상반된 모양이었다. 김영태의 바둑두기는 일상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모양이었는데 마치 에스파니아 투우에서 황소처럼 돌진하여 밀어대는 모양이 멧돼지가 굵은 목으로 비비며 밀어대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고 그냥 막무가내는 아니고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장고하며, 명문대에서 수학할 정도의 평소 습관답게 철저한 수읽기를 통해 예상하는 모양으로 쳐들어오는 상황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버릇도 있고 바둑의 기초도 따로 공부하지 않은 막바둑이라 열린 공간에 쳐들어오는 상대를 투우사가 된 것처럼 직관으로 포석을 진행하면서도 생각을 특별히 하지 않았다.

바둑의 형세는 김영태가 우등생답게 기초와 철저한 수읽기를 통해 두지만, 경험이 많은 내가 흐름에서 조금 앞서는 듯했다. 당시 조사선(祖師禪) 바나리 수행자로서 스승을 자처하며 내게 보이차와 음공(陰功)과 기()에 대한 안내로 옛 절터와 산천을 안내한 적이 있고, 이면에서는 나 모르게 빙의(憑依)로 내게 장애 현상을 강요하고 있었기에, 돌을 번갈아 가며 두자는 제안도 받아들이고 바둑을 끝내고 복기를 하는 대로 맡겨서 동수(同數)로 인정했지만, 무리수로 같은 수준을 만들려는 것을 알아본 내색을 하니 들킨 겸연쩍음에 갑자기 짐승의 성질이 느껴지는 괴성의 웃음을 토해내었다. 김영태가 웃고 나서 자신의 평소와 다른 웃음의 성품을 알아본 내 마음을 김영태가 또한 알았으니, 그 성품이 진정한 사람의 성품이 아닌 귀()의 성품이 몸 안에서 튕겨 나온 것임을 서로 알고 인정한 것이다. 평소 빙의(憑依)의 위험성에 대하여 말하며 주체성에 대한 가치를 역설해오던 그가 실제로는 스스로 빙의(憑依)되어 사는 가짜의 주체성으로 사는 존재인 것이었다.

바둑을 둘 때 김영태의 기운 조율로 머릿속의 기운이 움직여서 움직이는 대로 같이 돌리니, 무용담처럼 내게 말하기를, 바른쪽으로 머릿속 기운을 돌리는 이에게 기운을 자신처럼 왼쪽으로 돌려서 자신이 이겼다고 했다. 김영태가 이겼다고 한 이는 스승 아라가비 님과 서해진 선생이며 머릿속 기운을 강제로 역회전시킨 행위는 빙의(憑依)로 자신의 의식(意識)을 두 분의 신경(神經)에 전이(轉移)해서 기()의 흐름을 강제했다는 말이다. 지금도 두 분뿐 아니라 스승의 제자로서 김영태가 같이 동문수학했다는 김종훈, 박송학, 윤경묘, 한상현 선생과 김기환, 이동진, 장화영, 이창윤 선생 등이 김영태의 빙의(憑依)와 독기(毒氣)에 심각한 침해를 당하고 있다. 머릿속 기운을 강제로 돌리는 무리한 행각은 어이없는 파렴치한 행위이고 빙의(憑依)의 속성상 막을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당하며 보시는 것일 뿐인 것이다. 이외에도 다른 종단의 수행자들도 같은 피해를 입는 이들이 여러분 있다.

 

어머니가 마늘을 찧고 계신다. 소금을 조금씩 넣고 찧으시길래 이유를 여쭈었더니 튀어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고 미리 간도 되니 좋다고 하신다. 마늘을 찧는 것이 우연일 수 있지만, 김영태의 의사는 마늘의 마가 자신이 정체성인 마귀(魔鬼)라는 뜻의 魔字이며, 늘 그렇듯이 나의 어머니를 김영태 자신이 빙의(憑依)로 쓰는 표상(表象)이라는 것이다. 빙의(憑依)로 하는 표상(表象)은 신화(神話)가 아니다. 허구의 거짓말일 뿐 제물(祭物)이며 나의 어머니를 잡고 위협하는 인질극이다.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김영태에게 상상센터 고마에서 발효강좌를 청해서 주위의 여러분들과 같이 들었을 때, 김영태가 무량의(無量義)를 쓰지 못하는 귀()의 특성상 나의 의식(意識)에 빙의(憑依)해서 나의 의식(意識)을 사유(思惟)의 공간으로 쓰며 강의(講義)를 한 것이라고 하신다.
김영태는 바둑도 나의 의식(意識)에 빙의(憑依)한 상태에서 나의 의식(意識)을 공간으로 활용하여 수읽기와 포석을 하면서 나를 대응한 것이고, 김영태에게 빙의(憑依)로 기억이 점유되어 사유(思惟)가 어려운 나는 한마음의 스승께서 의식을 열어 보여주시면 무량의(無量義)를 통해 바둑을 두는 것이다.

김영태의 몸에서 나온 귀성(鬼性)의 웃음소리는 신()인 스승께서 김영태의 의식을 조율하여 그의 몸에서 튀어나오도록 해서 서로 알도록 하신 것이고, 과거의 의식을 현실에 옮겨 놓고 그 속에서 사는 비현실의 귀()와 대응하여 바둑을 두는 것은 신()과 한마음인 여래(如來)의 보살행(菩薩行)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