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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초상화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남긴 숍츄드 템젤투 씨. ❘ 자유아시아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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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남몽골 자치·인권 운동에 평생 바친 칭기즈칸의 후예 숍츄드 템젤투 | 중국인권 | 에포크

중국 땅서 태어난 칭기즈칸의 후예 중국공산당 통치하에서 동족 해방 시키는 꿈 일흔을 바라보는 한 노인이 있다. 그의 이름을 두 개다. 하나는 숍츄드 템젤투(Temtsiltu Shobtsood), 다른 하나는 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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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인터뷰

[피플] 남몽골 자치·인권 운동에 평생 바친 칭기즈칸의 후예 숍츄드 템젤투

정향매

20240828일 오전 10:57

 

중국 땅서 태어난 칭기즈칸의 후예
중국공산당 통치하에서 동족 해방 시키는 꿈

일흔을 바라보는 한 노인이 있다. 그의 이름을 두 개다. 하나는 숍츄드 템젤투(Temtsiltu Shobtsood), 다른 하나는 시하이밍(席海明)이다.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중국 내 소수민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숍츄드 템젤투 씨는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내몽골(内蒙古)자치구 산하 행정 단위 중 하나인 나이만(奈曼)기에서 태어났다. ‘()’는 청() 지배 계급 팔기(八旗)에서 유래했고 나이만은 튀르크계 유목민족 나이만족에 연유한다.

 

몽골은 두 개로 나눠져 있다. 고비 산맥을 경계로 바깥은 외몽골, 안은 내몽골이다. 외몽골은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몽골공화국)으로 독립했고, 내몽골은 중국 내 자치구로 남았다.

 

몽골인은 내몽골이라는 명칭보다는 남몽골을 선호한다. 내몽골이라는 용어가 중국이 본디 몽골인의 영토인 해당 지역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중국 중심적인 용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들은 “‘우부르 몽골(Uvur Mongol)’의 원 뜻은 남몽골혹은 몽골 남부이다라고 주장한다. 몽골 역사에서 이 지역은 막남몽골(漠南蒙古), 즉 고비사막 이남 몽골로 기록돼 있다.

 

두 개의 몽골

 

중국 영토에서 태어났지만 몽골족으로서 정체성을 강하게 느끼는 숍추드 템칠투 씨는 남몽골 자치·인권 활동가다. 남몽골쿠릴타이(의회) 의장이자 내몽골인민당 주석이다.

 

지난 819, 서울대학교 우석경제관에서 열린 국제 포럼에서 처음 만났을 때 숍츄드 템젤투 씨는 시 한 수를 들려줬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후룬베이얼 초원. ❘ 웨이보.

 

하늘은 푸르고 초원은 끝없이 넓은데(天蒼蒼 也茫茫),

바람 불어 풀이 흐느적거리면 소 떼 양 떼 나타나네(風吹草低見牛羊).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 몽골 유목민들이 대자연 속에서 가축을 치면서 불렀던 것으로 알려진 목가 칙륵가(敕勒歌)’의 한 구절이다. 그는 목가에서 묘사한 초원 풍경은 내 고향 몽골에서는 이미 영원히 사라졌다며 한숨 쉬었다.

 

옛 노래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숍츄드 템젤투 씨는 망향객 신세다. 1992년부터 독일에 거주하고 있다. 고향 남몽골은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다.

 

해외에 거주하며 남몽골 독립운동을 이끌고 있는 숍츄드 템젤투 씨는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떤 사연으로 고향을 떠나오게 됐을까.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숍츄드 템젤투 씨는 고향을 떠나올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91620일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었습니다. 68일 출발하여 12일 동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걸어 마침내 몽골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 방향을 돌아보며 세 번 절했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죠. 고향과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습니다.”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숍츄드 템젤투 씨는 말했다. “대부분 사람처럼 저도 고향과 가족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야만적인 식민 통치로부터 몽골인의 인권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몽골 (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 과 외몽골 ( 몽골공화국 ). ❘  자료 이미지 .

 

숍츄드 템젤투 씨는 1956년생이다. 그의 유년 시절 중국은 격변의 연속이었다. 1958년 마오쩌둥은 이른바 대약진운동을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대량 아사자가 발생하는 대실패로 끝났다. ‘대약진(躍進)’이 아니라 대역퇴(逆退)’였다. 초등학생 시절 중국은 또 다른 격변기에 접어들었다. 1966년 시작돼 10년 지속된 문화대혁명이다. 초기 베이징에서 중국공산당 간부, 지식인을 상대로 자행된 무차별 폭력은 전국으로 번졌다. 소수민족 자치구도 피해가지 못했다. 남몽골 지역이 첫 대상이었다. 역사에서 내몽골인민혁명당(내인당) 숙청 사건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1911년 신해혁명 결과,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해 세계 최초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이 탄생했다. 1920년대 몽골에서도 공산 혁명이 발발했다. 1924년 소련의 도움하에 외몽골은 독립해 몽골인민공화국이 성립했다. 세계 두 번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여파는 내몽골로도 파급됐다. 내몽골인들은 중국으로부터 독립’ ‘내외몽골 통일을 기치로 내몽골인민혁명당을 결성했다. 1931년 일본 관동(關東)군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라 일컫는 중국 동북부를 점령했다. 1932년 만주국을, 1939년 몽강연합자치정부(몽강국)를 성립했다. 두 개의 괴뢰국을 세운 일본은 몽골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내몽골인민혁명당은 해체됐다.

 

1945년 일본은 패망했다. 만주국, 몽강국도 소멸됐다. 몽강국의 일부였던 칭안총(興安總)성이 내몽골인민공화국명칭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내몽골인민혁명당도 재건했다. 몽골인민공화국은 몽골 출신 중국 인민해방군 장성 우란후(Ulaan Hüü)의 의견에 따라 발전적 해체를 택했다. 1945년 몽골인민공화국 정부와 정당은 중국공산당에 흡수·통합됐다.

 

남몽골 초원 휩쓴 문화대혁명 광풍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파견해 내몽골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덩샤오핑은 우란후 내몽골 자치구 정부 주석을 실각시켰다. 분열주의자, 지역주의자라는 비난도 따랐다. 당시 인민해방군 상장으로서 군부 실력자였던 우란후는 몽골왕(蒙古王)’으로 불렸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국무원 총리의 보호하에 우란후는 왕쯔리(王自力)’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개명한 끝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중국 정부는 내몽골인민혁명당이 재건됐다고 주장했다. 다수 몽골인을 반동분자로 간주해 검거·투옥했다. 내몽골자치구정부는 폐지됐고 군정이 실시됐다. 인민해방군은 분열주의자, 지역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워 내몽골 각지에서 몽골인을 닥치는 대로 감금하고 고문했다. 감금된 몽골인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1967 년 하반기부터  1969 년  5 월에 이르기까지 중국 당국은 내몽골자치구에서  ‘ 내몽골인민혁명당 색출 운동 ’ 을 전개했다 . ‘ 반동 분자 ’  누명을 쓰고 대중의 비난을 받은 몽골인 . ❘  웨이보

 

만행의 원인은 1960년대 중·소 갈등 속에서 내몽골 지역 지배권 강화에 있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했다. 이 속에서 마오쩌둥은 소련이 사실상 위성국가몽골인민공화국을 앞세워 내몽골 지역을 분리·독립시켜 통합 몽골을 세울 것을 우려했다.

 

엥헤바투 토고촉(Enghebatu Togochog) 남몽골인권정보센터(SMHRIC) 이사장은 중국 인권·종교 전문지 비터윈터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최소 10만 명의 남몽골인이 살해당했고 50만 명이 박해받았습니다. 당시 남몽골 전체 인구는 150만 명에 불과했죠. 세 명 중 한 명은 종족 학살 정책의 피해를 본 셈입니다. 그중 몽골족 지식인은 민족주의 분리주의자, 일본 제국주의자의 첩자, 수정주의자로 간주돼 숙청당했습니다. 몽골인민혁명당 당원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중앙 정부가 설계, 지휘하고 중국인민해방군, 남몽골 거주 한족들이 이를 집행했습니다. 남몽골 민족 전체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죠.”

 

숍츄드 템젤투 씨의 가족도 박해 대상이었다. “당시 저는 만 12세였습니다. 베이징군구 부사령관 텅하이칭(騰海青) 중장이 인민해방군 제27집단군을 지휘해 내몽골에 왔습니다. 인민해방군은 몽골인들을 구금한 후 국가 분열을 도모한 죄를 자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그 대상이 됐습니다. 어머니는 심문 후 풀려났지만, 할아버지는 구금 끝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숍츄드 템젤투 씨는 슬픈 목소리로 당시 사건을 이야기했다. “할아버지에게는 내몽골인민혁명당과 결탁해 국가 분열을 도모했다는 누명이 씌워졌습니다. 감금 기간 내내 심문, 구타가 이어졌습니다. 저는 매일 약 2km를 걸어 구치소의 할아버지에게 음식을 전했습니다. 할아버지 얼굴은 매번 멍이 들어있었죠.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구치소 수감 42일째, 군인들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사망 소식과 함께요. 아무런 준비 없던 가족들에게 사망 즉시 매장해야 한다며 집 근처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낡은 옷장에 할아버지 시신을 넣어 매장해야만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두개골은 함몰돼 있었습니다. 인민해방군은 할아버지 묘지에서 반역 죄인 숙청을 자축하는 행사까지 치르고서야 자리를 떴습니다.”

 

숍츄드 템젤투 씨는 상황을 회상하면서 잠시 침묵에 잠겼다 이내 말을 이어갔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어른이 되면 나쁜 기억도 자연히 잊히리라 생각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당시 상황이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현재도 당시 느낀 공포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후 숍츄드 템젤투 씨의 가족은 고향 마을을 떠나 내몽골자치구 구도(區都) 후허하오터(呼和浩特)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또래 몽골인 친구들을 만났다. “알고 보니 거의 모든 몽골인이 문화대혁명 기간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어요. 아버지가 자살하거나 어머니가 집단 성폭행을 당한 사례가 무수히 많았죠.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문화대혁명은 우리 집안에만 고통을 줬던 게 아니라 몽골족 전체에 재난과 비극을 가져왔다는 사실을요.”

 

몽골족에 재앙을 불러온 중국공산당은 반성하지 않았다. 숍츄드 템젤투 씨의 말이다. “1972년 마오쩌둥이 이른바 내몽골인민당 숙청운동을 끝내면서 그는 잘못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 대신 살인 규모가 조금 확대됐구나라고 했습니다.”

 

숍츄드 템젤투 씨가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시기 중국공산당 정부는 내몽골 지상(地上)에서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학살했고, 지하(地下)는 오염시켰다. 비밀 핵실험을 하고 핵폐기물을 매립한 것이다.

 

중국은 1960년대 초부터 남몽골 남부 알라사(阿拉善)사막에서 소규모 핵실험을 실시했습니다. 해당 지역을 핵폐기물 매설지로 삼고요. 중국 당국은 현지인들에게 인체에 유해한 핵폐기물이 매립됐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현지 주둔군은 외부에서 반입한 식수를 마시면서도 몽골 목축민에게는 그곳의 물은 인체에 해롭기 때문에 마셔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4년 후인 1964년부터 해당 지역 목축민들이 내몽골의과대학부속병원에 백혈병으로 입원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일부 몽골인 의사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저우언라이 당시 국무원 총리는 병원에 군대를 보내 몽골족 의사들이 수집한 관련 사례, 정보를 압수했습니다. 국가 기밀이라며 함구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1986년에는 독일 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독일의 핵폐기물을 수입해 매립했습니다.”

 

지상에는 학살 지하에는

 

19769,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青)을 비롯한 문화대혁명 4인방은 실각했다. 10년에 걸친 광풍은 소멸했다. 19783, 중지됐던 대학 입학시험이 부활했다. 숍츄드 템젤투 씨도 응시했다. 그는 후허하오터의 내몽골사범대학(현 내몽골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숍츄드 템젤투 씨는 몽골인으로서 민족의식에 눈뜨게 됐다. 자연히 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시대의 분위기도 있었다. 1978년 복권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등 개혁파를 중용했다. 1980년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된 후야오방은 정치·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학생들의 민주화 개혁 주장에도 온정적이었다.

 

1981년 숍츄드 템젤투 씨는 내몽골 지역 6개 대학의 몽골인 학생 3000여 명을 규합해 내몽골학생운동을 주도했다. 하다(Hada)를 비롯한 학생 리더 14명과 함께였다.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대학생, 유목민을 중심으로 전개된 학생운동 주제는 중국의 내몽골 정책, 내몽골 초원 황폐화 문제였다. ‘중국 내 기타 성(()에서 내몽골로 지나치게 인구 유입이 늘어나고, 몽골인의 터전인 초원도 황폐해진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내몽골자치구 중국공산당위원회 제1서기가 몽골인이 아닌 한족(漢族)인 점도 지적했다. 당시 우란후는 중국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장을 지낸 후 내몽골자치구 당위원회 제1서기를 맡았으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실각했다. 대신 한족 출신 저우후이(周惠)가 임명됐다. 913일 학생들은 한족은 내몽골을 떠나라는 구호를 외치며 후허하오터시 신화광장을 행진했다. 이후 시위는 이어졌다.

1981 년 내몽골학생운동 자료사진 . ❘  웨이보

 

후야오방 중국공산당 총서기 체제하에서 내몽골자치구 중국공산당위원회는 학생 운동에 온건하게 대처했다. 저우후이 제1서기는 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소수민족 지역의 안정을 위해 시위 학생들을 체포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고 이를 이행했다. 대신 저우후이는 학생들을 동정하는 대학 교장(총장), 간부들을 대거 좌천시켰다.

 

다수 시위 참여 학생은 구금되지 않았다. 졸업 후에는 직장에도 배속됐다. 숍츄드 템젤투 씨는 예외였다. “중국 당국은 학생 운동 리더들을 구금하지 않고 직장에 배치하는 주는 대가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후 세력을 털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요구 사항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학생운동을 주도한 것은 잘못된 행동이 아니고 우리를 조종한, 이른바 배후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 결과 저는 198112, 대학 졸업 후 중국 땅을 떠나는 1991620일까지 장장 11년 동안 백수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직자 신세의 숍츄드 템젤투 씨는 비밀리에 동료들과 함께 몽골문화연구회를 설립해 못다 한 민족 운동을 이어갔다. 그 연장선상에서 1990년 후허하오터에 몽골학 전문 서점을 열기도 했다. 그러다 19913, 현지 관리들로부터 입수한 내부 문건을 통해 당국이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저는 생각했습니다. ‘중국을 탈출해 국제 사회에 몽골인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알리자. 외부 압력이 가해지면 중국공산당 정권도 반성할 것이다라고요.” 앞서 1989년 티베트 정교(政敎)일치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이를 계기로 중국공산당 치하 티베트 인권 문제가 국제사회에 공론화되는 선례를 떠올렸다고 숍츄드 템젤투 씨는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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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 달라이라마 노벨평화상 수상을 매년 기념하는 이유는” | 한국티베트공동체 | 달라이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을 맞아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정토마을에서 티베트 민족의 종교·지도자 제14대 달라이 라마 존자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기 위한 ‘제2회 세계 평화의 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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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검열과 통제가 심각한 중국에서도 국제 사회 소식에 밝았던 것도 한 원인이다. “한 친구가 홍콩 출장을 다녀오면서 필립스 단파 라디오를 선물했습니다. 라디오로 매일 미국의소리(VOA), 자유아시아방송(RFA), 대만국제방송(RTI) 등의 방송을 청취했습니다.”

 

1991년 탈출 결심을 굳힌 숍츄드 템젤투 씨는 지인을 통해 몽골 정부에 탈출 계획을 알렸다. “몽골 정부에 사전에 알렸기 때문에 국경에 들어서자마자 국경수비대에 체포됐습니다. 다음 날 소형 비행기에 실려 수도 울란바토르로 이송됐고요. ‘불법 입경죄혐의로 구금됐습니다. 몽골 외국인관리청 관리들은 친절했습니다. 몽골에 왔으니 수도 구경은 한번 해야 한다며 울란바토르 시내를 보여주기도 하고요. 제 신병 처리를 두고 관리들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중국과 외교 관계를 고려해서 강제 송환해야 한다는 의견과 내몽골 자치구 여론을 감안했을 때 송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탈출에 앞서 몽골 정부는 중국 정부의 외교적 압력 때문에 중국에서 탈출한 몽골 운동권 인사 다수를 강제 송환했습니다. 몽골 정부 처지도 곤혹스러웠습니다. 1924년 이후 70년 가까이 지속된 구소련의 속박에서 갓 벗어난 때였습니다. 내몽골 민족운동가 강제 송환으로 내몽골인으로부터 지탄받았습니다. 분노한 내몽골인들이 대거 국경을 넘어올 것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결국 몽골 정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번 저를 돕기로 했습니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서 자국에 남겨둘 수는 없지만 제3국을 선택하면 외교 교섭을 통해 해당 국가 난민으로 만들어 주기로요. 당시 몽골 정보부문 고위관리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숍츄드 템젤투 씨는 구금 중 만난 관리도 힌트를 줬다고 덧붙였다. “저를 심문했던 관리가 일단 제가 불법입경죄를 시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중국으로 강제 송환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죄를 시인했습니다. 재판에 넘겨졌고 3년형이 선고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폰살마깅 오치르바트 몽골공화국 대통령이 특별사면권을 행사하여 저는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1992, 숍츄드 템젤투 씨는 독일로 가게 됐다. “3국을 택해야 했는데 고민 끝에 독일을 선택했습니다. 지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권 단체 등이 독일행에 도움을 줬다. 그는 독일로 가게 된 것은 천운이었다고 회고했다.

 

독일에서 새로운 삶 그리고 목표

 

독일에 도착한 숍츄드 템젤투 씨는 처음 2년간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현지 대학에서 역사학 공부를 마친 후 우체국에 취업했다. 26년간 야간 근무를 전담하다 2년 전 정년으로 퇴임했다. 아내와 딸은 그가 떠나온 지 6년 후인 1997년에야 중국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처음 중국 정부는 가족의 여권 발급을 불허했다. 그러다 1994년 당시 클라우스 킹켈(Klaus Kinkel) 독일 연방 외무부 장관이 중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숍츄드 템젤투 씨는 독일 정부에 탄원했고, 독일 정부의 외교적 노력 끝에 3년 후 가족은 독일로 갈 수 있었다.

 

숍츄드 템젤투 씨는 해외 망명 생활을 하면서 민족 자치·독립 운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1992년 몽골에서 달라이 라마와 비밀 회동을 했습니다. 그해 달라이 라마가 제의한 티베트-몽골-위구르 3자 회의의 초대 몽골 대표로 지명됐습니다. 3자 회의는 달라이 라마가 1985년 처음 주창했습니다만 1992년 제가 몽골 대표가 된 후에야 공식 가동됐습니다. 이후 티베트, 위구르 민족 활동가들과 함께 중국 당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반대하고 중국 내 인권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해외 중국 민주화운동 인사들과도 다수 접촉했습니다.”

 

이후 활동에 대해서 숍츄드 템젤투 씨는 설명을 이어갔다. “달라이 라마(티베트 망명정부)-중국 관계에 변화가 생기면서 3자 회의는 중지됐습니다. 민주화 인사들과도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2012~2013년 즈음 중국의 민주화 운동이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는가하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지난  8 월  20 일 ,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제포럼에서 발언하는 숍츄드 템젤투 씨 . ❘  한기민 / 에포크타임스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다. “당시는 국제사회가 중국 경제 발전을 도우면서 인권 개선을 호소하면 중국공산당이 일당독재를 포기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다만 시간이 흐른 후 중국공산당이 존재하는 한 중국인은 진정한 자유를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중국공산당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몽골 민족의 유일한 출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이유로 몽골 인권 문제를 들었다. “남몽골 인권은 문제수준이 아니라 재앙수준입니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지난날 남몽골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한 데 이어, 현재는 문화 말살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남몽골 문제는 주권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이 땅에서 살아왔습니다. 흙에는 조상의 피땀이 배어있고요. 국제법상 속인주의에 의하면 중국인이 우리 주권을 강탈할 권리는 없습니다.”

 

숍츄드 템젤투 씨는 한국 방문이 처음이다. “아시아 국가 중 일본은 10번 방문했습니다. 대만도 자주 방문해서 익숙하고요. 한국은 처음입니다.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을 보면서 감회가 남다릅니다.” 휴전선과는 사뭇 다른 몽골공화국과 남몽골 국경에 대해서 숍추드 템칠투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몽골을 양쪽으로 나눈 중국과 몽골공화국 간 국경은 남북한을 가르는 휴전선에 비해서는 평온할지 모릅니다. 공통점은 양측 주민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 민족을 갈라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내외몽골 처지가 떠오르기도 한다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직까지 외몽골(몽골공화국)은 저발전 상태입니다. 러시아의 영향력하에서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죠. 남몽골은 중국공산당 정권 통치하에서 활로를 잃었습니다. 반면, 삼성, LG 등 글로벌 대기업을 보유한 한국은 강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나아가 남한(한국)은 반드시 북한과 평화 통일을 해야 합니다. 전쟁을 통한 통일은 국민에게 고통만 안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재연해서는 안 됩니다.”

 

숍츄드 템젤투 약력

1956년 중국 내몽골자치구 나이만기 출생

1978년 내몽골사범대학(현 내몽골대학) 역사학과 입학

1981년 내몽골학생운동 주도

1991년 몽골인민공화국 망명

1992년 독일 망명

1997년 남몽골인민당 창당, 당 대표 선출

2011년 제1회 칭기즈칸 인권상 수상

2016년 남몽골쿠릴타이(의회) 창설, 의장 선출

2018년 인도태평양자유연맹 창설, 부회장 추대

 

* 이 기사는 최창근 기자가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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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붓다 고타마 아무 대덕 정진웅  견해]

2024. 9. 5. 10;12

 

어제를 향하여 세상에 봄이 차오르는 오늘

우리는 지금 태미원 나라의 현재(대한민국과 세계 인류)를 대상으로, 한국인 흉노족 영해 박가의 현실인 박현(아라가비)이 현실사회에서 약 30여년전부터, 자신의 족속 영해 박가의 신라 박제상을 거치는 약 이천년의 세습 내력에 따라, 고조선의 수행인 족첸수행(좌도 딴뜨라의 원형) 가문인 오천(연일 정씨)의 천통세가 환인 수행 계보(현재 오천 정씨 23세손 정진웅-고타마 아무 대덕 홍익인간 붓다)하고 가계 구성원의 기억(뇌 송과선 소마영역)에 비밀리에 숨어들어 기생하며 기억과 천운과 천부와 무량의와 신통력을 독점하고 약탈하여 퍼날르며 연기법을 교란하여 현재성의 현실태인 재물과 명예를 약탈하는 행위인 원죄인 가스라이팅 행위를 한다.

또한, 이들은 구경열반 수행의 내면 혁명으로 연 태미원의 나라(현실태 고조선(고마))의 백성인 모든 인류의 기억을 점유하고 천운과 천부를 약탈하는 가스라이팅 행위를 하는, 전위집단' 바나리'(마피아인 당취 집단, 사이비 좌방선도교단을 표방하고, 사람과 국가, 나라, 영역 등을 대상으로 그림자 정부 행위의 사이코 패스 행위로 유대공산주의화 하는 전체주의 범죄행위를 하는 '불의 제사' 마피아 매음굴 집단, 현실태 한국문화정품관, 사캬무니 붓다의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한 대숲바람 출판사의 책 '사캬무니 붓다'에 안내하는 '불의 설법'과 '깟싸빠 삼형제의 귀의'와 같은 사건과 같은 행위를 하는 집단, 현실에서는 실행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의식내부에서 숨어들어 기생하는 '기생충' 현상인 문둥이, 오이디푸스 행위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스라이팅 장애를 걸고 인생을 농락하며 나중에는 학살하는 유대 공산화 반인륜 전체주의 집단의 원형이다. 외부 현실태 중에, 종로3가 돈화문 앞에 '일세정 한의원-원장 박경호'도 가짜 변증 세계관이자 가짜 변증 인간관으로 가스라이팅 타르텔 범죄 행위를 원흉 박현과 연좌 구조 속에서 의료행위를 하는 의원급 한방 병원이 있고, 전국에 수십개의 지점을 통해 카르텔을 형성한 '지유명차'가 활동 한다. )

그리, '지유명차 주식회사는, 바나리 수행과 보이차를 매개로 하여 사회와 사람을 대상으로 현혹, 세뇌, 포섭, 억류, 숙주 제물 대상화, 식민화하는, 피라미드 연좌 구조의 자금 세탁 기업, 문둥병인 '흉노의 장애'를 원흉 박현이 구성원들을 찾아오는 대상자들의 의식을 점유하는 장애를 거는데, 장의의 유형은 '보이차 명현반응'이라고도하고, 좌방선도의 중추기학 '구궁기로식'이라고도 하며, 집단 구성 초기에 발행한 잡지 '모울도뷔'를 나눠주며, 고급 선가 수행을 안내한다고 속이며, 가스라이팅의 제물로 삼는다.

위 사실은 대한민국의 조계종, 대한불교진흥원, 인천 용화선원을 비롯한 불교계가 이미 알고, 대종교, 중산도 등 민족 종교 계열과 노원구 소재 청림요가원 등의 수행가에서 초기부터 원흉 박현의 방문과 현혹을 겪어서 알고 있다.

흉노 원흉 박현은 이처럼 세계 인류를 대상으로 가스라이팅 행위로 하는 유대 공산화 반인륜 전체주의 행위를 하는데,

2004년 부터, 이미 내가 내 어머니 자궁에 환인과 붓다의 환생이자 보살로 잉태할 때부터 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환인 계승 내력에 기생하는,

관습에 따라 제 아비 박종덕의 빙의(憑依, 빙가스라이팅) 행위에 따라 내 송과선 소마 영역에 기생하며, 가짜인 오이디푸스로서 내 천운과 천부와 무량의에 기생하며 살아오다가,

2004년 환인과 붓다의 환생자로서 열 살부터 기억을 점유하고 약탈하는 흉노 영해 박가의 장애때문에 어렵게 시작한 생멸문 형태의, 족첸수행 중인 나 정진웅이, 큰 아들 정땅의 중학교 교육과 흉노의 장애를 벗겨 주고자 찾은, 개교 중인 대안중학교 '강화마리학교'에서,

이전부터 흉노 박현 자신을 찾아와 제자가 된 당시 교장 마라가비 황선진(황선진은 본래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 일찍부터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다가 불교수행으로 유물론을 넘은 정상인인데 홍노 원흉 박현에게 전통수행이자 정신문화라를 안내한다는 사이비 좌도수행 '바나리'에 속아서 박현의 제자가 된 채, 본래 약탈 대상인 천통세가 오천 연일 정씨의 현실인인 나 정진웅의 반야지혜인 기억을, 훔처 포장하여 팔아먹는 흉노 박현의 안내에 속아서, 선한마음으로 마리학교를 사회운동 차원에서 시작하고 우리 전통의 수행과 정신문화를 안내하였지만, 배후에서 숨어들어 기생하며 가스라이팅 행위로 교장인 자신과 교사들, 학생과 학부모와 찾아오는 숳많은 인재들의 운과 부와 무량의로 이루어진 현재성을 약탈당하는 줄 모르고 피해를 입고 모진 침해를 당한 위인이다, 황선진의 인터뷰 내용이 빨갱이 홍동지 집단 '바나리'의 기관지 '모울 도뷔'에 나와 있다. 또한, 흉노 박현과 매로 결탁한 채 화신인 나의 기억 송과선 소마 영역에 오이디푸스로 기생하며 기억을 약탈해온 마루달 김영태 역시, 흉노 원흉 아라가비 박현의 초기 중추 제자로 활동하던 마루달 김영태의 '신화'에 대한 기사도 모울도뷔에 실려 있다.)

세습 내력에 따라 영해 박가의 매(魅, 거지발싸개역으로서 천운이 막힌 채 태어난 흉노인 영해박가의 자아체 새끼들의 神性으로 접붙여진 채 살아온 신라 김씨의 후예 족속 청풍김가의 현실인) 마루달 김영태를 '마리생협'의 대표를 만나고서 부터 현재까지,

2012년 내가 구경 열반한 내면의 혁명를 통하여 태미원의 나라(현실의 나라 고조선, 아쉬람 수행공동체 상상센타 고마)를 열고, 2015년 9월부터 서로 약속하에, 나는 역참의 대승 보살행이자 딴뜨라 좌도 수행의 표본인 족첸수행이자 으로, 아라가비 박현과 바나리는 가짜 좌방선도, 선가 고급 수행계로 하여, 현실과 비현실 초현실의 모든 동서고금의 현재를 일치한 나의 송과선 소마 선정상태의 좌표 영역에서 , 서로 말과 행동으로 대면하고 24시간 동안 수면시간조차 동시에 겪으며 확인하고 해명하여,

내 가문이 구경열반의 혁명으로 무량의를 동서고금에 고루 나누는 중에, 가스라이팅으로 숨어들어 반역하고 약탈하는 만악과 만병의 시뮬라크르 현실을, 본 홈페이지 블로그 , ,<어제를 향하여 세상에 봄이 차오르는 오늘>에 기록하고, 페이스북 홈페이지를 통하여 세계에 알리고 있고, 현행법 차원에서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서울중앙지검조직법죄수사과, 청주검찰청, 충주검찰청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제보하여 고소, 피고소 중이다, 다만 제보 고소하고 피고소로 모함 모략 당하는 중에, 사법 영역의 공무집행자들의 의식조차 흉노 박현이 일상에서 점유하고 세뇌하여 모든 '견해로 부터 사유, 말, 행동, 생활, 노력, 마음챙겨 새김, 집중에 이르는' 8정도 영역을 마술로 기생하며 조작하는 행위로 인하여, 바른 판단과 선고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아예 기억과 사유를 교란하여 사건을 구성하지 못하거나 사건을 조사 구인 진술등의 행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표류하므로써, 현재 국가와 세계인 나라의 현실이 '연성전체주의'의 카르텔 속 비현실에서 신음하는, 서양 중세시대의 암흑기의 전조를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마약 중독의 현실이 시스템(흉노의 장애인 카르텔)하고 있는 세계 현실과 각종 정신병과 육체질병, 도착형 범죄와 사고 등이 그 예다.

빨리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정부기관에서 즉시 체포하고 약물처방하여, 정신분열병의 돌연변이 증상을 중단시켜서, 가스라티팅의 기생상태를 꺼뜨린 채,

우주 불성으로 전환하여 법신 여래의 정체성으로써 모든 흉노의 범죄 과정을 확인한 나 고타마 아무 대덕 정진웅의 협력과 안내에 따라 조사하여 정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