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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에서 행복을 발견한 히로 사치야가 쓰고 이미령이 옮긴 에세이를 2003년에 대숲바람 출판사를 시작하며 첫 책으로 펴낼 때 박효열 사장이 제안하여 2000년에 자동기술한 시와 상징 이미지를 합하여 수제본한 나의 책 <그림자>에서 옮긴 그림들을 다듬어 엮은 <행복의 발견>의 스므일곱쩨, 스므여덟째, 스물아홉째 이야기입니다. ------ **두번째 화살   깨달음을 연 부처님 같은 성자도 우리 범부들과 똑같이 ‘첫번째 화살’을 맞습니다. 하지만 범부는 곧이어 ‘두번째 화살’을 맞지만 성자는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뭔가에 채여서 넘어졌다고 합시다. 그때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화살’입니다. 우리 범부들도 ‘아프다’고 생각하고 부처님 같은 분도 똑같이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 범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어서 ‘두번째 화살’을 맞습니다. “대체 누가 여기에 이런 걸 놓아뒀어? 다치면 어떡하려구 그래? 정신 좀 차리란 말이야.”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질러버립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분노하며 소리지르고 맙니다. 이것이 ‘두번째 화살’입니다. 이것은 좋은 사물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으면 ‘아, 예뻐라…’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 범부들이나 부처님 같은 성자나 다 똑같습니다. 이것은 ‘첫번째 화살’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경우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우리 범부들은 그것에 집착해버립니다. 꽃을 꺾어서 집에 가지고 돌아오고 싶어합니다. 또는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두번째 화살’입니다. ‘두번째 화살’은 범부들만 맞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가르쳐주는 것일까요? ‘아프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아름답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괴롭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전혀 무감각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집착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만다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입니다. 하긴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사람이란 말처럼 쉽게 집착하지 않고 툭 털어버리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반야심경》은 그것을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상행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작용입니다. ‘아프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수상행식”입니다. “역부여시”라는 것은 “또한 그와 같다.”라는 의미이며, 앞에서 ‘색’에 대해서 말한 것이 그대로 이 “수상행식”에 적용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반야심경》은 앞에서 ‘색’에 대해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색’을 ‘수상행식’으로 바꾸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상행식불이공 공불이수상행식 수상행식즉시공 공즉시수상행식受想行識不異空 空不異受想行識 受想行識卽是空 空卽是受想行識”이 됩니다. 이것이 “역부여시”의 뜻입니다. 흔히들 불교를 오해해서 일체의 욕망이나 번뇌를 완전히 끊고 바싹 말라 비틀어진 노인처럼 되라고 가르치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교는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반야심경》이 말하는 것은 ‘아프다고 생각해도 좋고, 아름답다고 생각해도 좋다. 다만 그에 집착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오해하지 마시길 당부합니다.     **미안하지만… 용서해주렴   지금까지 우리는 《반야심경》의 절정이라고도 할 만한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를 읽어왔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앞에 나왔던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의 “오온개공”을 자세하게 풀이한 대목입니다. 오온이라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리키는 말이며, 인간의 육체(色)와 정신(수·상·행·식)을 다섯 가지 요소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도 정신도 모두 ‘공’하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근본 주장입니다. 그것만 알면 우리는 이 경전을 완전히 끝낸 셈입니다. 너무 간단해서 맥빠지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머릿속으로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일상생활에서 실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이해한 것만으로는 진정으로 불교를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실천하면 좋을까요? 만약 집 안에 바퀴벌레가 나타났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퀴벌레에도 부처의 성품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서 양상추나 당근을 먹이며 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퀴벌레를 그냥 놔둬서 부엌에 가득 번식하고 나면 “좁은 부엌은 답답하니까 멀리 날아가렴.” 하고 창을 열어 날려 보내주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웃에게 폐를 끼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퀴벌레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이때 바퀴벌레는 해충이니까 죽여도 좋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만 《반야심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반야심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바퀴벌레를 슬리퍼로 쫓아낼 때 ‘바퀴벌레야! 미안하지만 죽어다오.’ 하고 사죄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죽이라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바퀴벌레는 이 지구에서 인류보다 먼저 살아온 선배입니다. 나중에 등장한 우리 인류가 “바퀴벌레는 해충이다. 죽여 버리자.”라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바퀴벌레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바퀴벌레는 해충이기 때문에 죽여도 좋다.’ ‘나비나 잠자리는 예쁜 벌레니까 보호해야 한다.’ 이런 차별심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결국엔 인간까지도 차별하게 됩니다. 해서는 안 되는 따돌림을 하게 됩니다. 그게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차별은 필요합니다. 아니 차별이라기보다는 구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영자는 사원에게 차별 없이 봉급을 전원 똑같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을 성적으로 차별하는 일은 좋지 않지만 오늘날의 교육에서는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불교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미안하지만…’, ‘용서해주렴’이라고 사과하는 마음입니다. 사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구별을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이며, 공의 실천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조금씩 차별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뛰어난 구성   다음으로 나아갑시다. 《반야심경》은 다시 “사리자여” 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관자재보살이 부르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은 처음에도 “사리자여”라고 이름을 부르고 나서,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설하셨습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그리고 관자재보살은 잠깐 사이를 둡니다. 그 사이 물을 조금 마셔서 목을 축였는지도 모릅니다. 물을 말해놓고 보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인들은 물을 잘 마십니다. 외국에서 온 여행자들은 인도에서 생수를 사서 마시면 곧바로 설사를 해버리기 십상인데, 인도인은 당연히 전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벌컥벌컥 물을 마시며 살아가고 있단 말씀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인도인 가운데 일본에 와서 도쿄의 수돗물을 마셨다가 설사를 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인은 인도의 물을 마시면 위험하다고 말합니다만 인도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물이 위험한 것이지요. 사물은 모두 상대적입니다.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버리긴 했지만 ‘인도의 물은 위험하다’는 식으로 사물을 고정적으로 생각하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이 가르치고 있는 공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물을 고정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가르침인지도 모릅니다. 이왕 이야기가 빗나간 김에 이렇게 교훈을 덧붙여두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은 맨 처음에 이른바 결론을 이야기한 뒤에 다시, “사리자여”라고 부릅니다. “이보게, 사리자! 내 얘기 좀 들어봐…”라고 말하려고 한 것이겠지요?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라고 관자재보살은 설명을 시작합니다. 처음에 결론을 요약해서 제시하고 나서 곧이어 자세히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럼 이 해설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일까요? 경전을 살펴보면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공중무색…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하여 관자재보살이 마지막까지 사리자를 상대로 가르침을 베푸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단락을 조금씩 나눌 수 있습니다. 경전 전체를 보면 아시겠지만 ‘불不… 불不… 불不… 불不…’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있고,‘무無… 무無… 무無… 무無…’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있으며,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있고,‘…주呪 …주呪 …주呪 …주呪’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 유명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의 ‘주呪’가 있습니다. 대체로 이렇게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단락을 지었는지는 그때그때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2021. 3. 15 오후 2;11

 

초월을 통해 깨달은 앎을 빙의로 훔쳐 쓰면 훔쳐 쓰는 빙의의 원죄를 짓고, 타락하여 학문으로 이루어진 앎을 쓸 때 마음이 청정하지 않으면 다시 죄를 짓는다.

 

학문은 본래 빙의로 인해 이루어진 것, 학문으로 깨달으려면 마음이 청정해야 하고 깨달은 마음을 현실에서 활용하려면 더욱 청렴해야 한다.

 

깨달은 존재와 깨달음으로 향하는 사람의 하늘과 세계와 깨달은 존재와 깨달음으로 향하는 사람의 하늘과 세계가 일어나는 몸과 정신을 범하는 불법 행위가 빙의로 짓는 죄이고 빙의로 죄를 지은 자리와 죄를 짓고 나서 받는 벌의 모양과 정도를 법률에서 드러내어 정하고 실행한다.

 

사람의 생사는 하늘이 정한 것이며, 하늘의 성품을 담은 사람의 생사를 정신분열로 조작하며 범한 흉노의 문화로 이루어진 선의 한계를 오늘의 선가는 이를 풀어 복원하여 하늘을 침범당한 수행가와 화해와 통일을 이루고자 한다. 단지, 흉노의 첩이 되어 악귀의 정체성으로 살아온 의성 김가와 의성 김가의 후예인 김영태가 이를 어기고 반역의 빙의를 일상의 세계에 대하여 강요하니, 이를 스승 아라가비 님이 선가에서 김영태와 의성 김가를 잡아놓고 두만선우로서 김영태의 빙의와 김영태의 빙의에 침범당하는 세계 인류의 삶을 조율, 조작하여 조화를 이루면서 빙의의 오욕을 감당하시며 여래가 되어 대하는 보돈선우인 제자들과 함께 발본색원과 조사를 통해 확인하여, 제자들의 수행가들이 당한 세계와 세계 인류가 당한 파괴와 타락을 해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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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라한

​ 참회로 이끄는 차 철라한 2018. 3. 3 05:13. 아라가비 박현 선생님의 전체 주재 아래 선가의 심리 수사로 김영태의 빙의행위 전반이 밝혀졌다. 사람 개인의 감각으로부터 정신계의 최고단계까지

jejupoonggyoung.tistory.com

jejupoonggyoung.tistory.com/161

 

참회로 이끄는 차 哲羅漢

​ ​ 참회로 이끄는 차 哲羅漢. 5 년 전 한국차문화협동조합의 차예사과정 무이산 차문화 탐방 때, 차를 만드는 화사장의 차창에서 시음한 철라한의 첫 잔이 몸안으로 들어가며, 몸 왼편의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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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하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모노노케 히메 (1997) もののけ姫 Princess Mononoke 에 오미과를 침범하여 초월의 하늘을 파괴하고 타락하는 흉노의 문화가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namu.wiki/w/%EB%AA%A8%EB%85%B8%EB%85%B8%EC%BC%80%20%ED%9E%88%EB%A9%94

 

모노노케 히메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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