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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움에 대하여

haeoreum 2018. 4. 30. 16:01

를 움직인다는 것은 허망한 분별식을 활용하지만, 정신계의 깊은 곳과 다른 , 다른 하늘; 또는 佛陀에 이르기까지,

신체의 세포와 기억과 신체를 이루는 세포와 체액과 體氣까지,

사회의 모든 영역과 관계망과 사회의 의식에 까지,

물질계의 동식물과 산과 강 등 자연물과 자연현상인 천지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세계 속의 한 존재로서 사람이 바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며 中道에 머물러 온갖 존재들과 서로 이롭게 하며 인연을 통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정의로움에 대하여

욕망 때문에 에 매이는 것은 자신을 가두고 사회와 세계를 가두는 그릇된 감옥 이다.

서로를 배타적으로 대하는 그릇된 를 움직이는,

정법이 아닌 마법은 자신과 세상을 죽인다.

예로부터 수행을 바탕으로 살던 사람들과 사회에는, 여름이 오면 파리 모기가 꾀듯 마술이라는 기운을 쓰는 사람들이 마음베낌(寫意, Mimesis)이 아닌 빙의(최면)를 통하여 타인에게 사악하고 위태로운 영향을 미치는 그릇된 행위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존재들을 예전엔 당취(땡초)라고 했다는데, 5년여 쯤 전 김영태 씨가 내게 한 말 중에 구한말과 일본의 식민치하 때 자신의 존재성을 찾기 위하여 인력거꾼이 되어 힘든 극한의 노동을 통한 삶을 살았다고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자신의 존재성을 찾기 위하여 극한의 신체활동이 필요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는 욕망에 빠져 길을 잘못 들어 주화입마에 빠진 행자가 겪어야 할 일이다.

김영태 씨는 祖師禪을 표방하고 내게 원주 부론의 법흥사지 등 옛 절터를 데리고 다니며 부도와 탑에 새겨진 형상으로 표현한 깨달음에 이르는 모양을 가리키며 수행의 모양을 일러주었고, 기운의 모양이나 신체에 작용하도록 하며 인욕을 권유 하였는데, 최근에 스승을 따라 알게 된 내용으로는 그가 빙의를 활용하는 의 상태에 갇힌 사람으로 타인에게 기운을 통한 장애를 만들고, 시험을 일삼으며 굴종하도록 하고 만약 시험에 걸리지 않고 굴종하지 않으면 강제로 기운을 활용하여 상대의 신체와 의식에 감응하여, 신경(기경맥)과 핏줄 등의 교란과 조종으로 심각한 병증에서 고통 받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경험한 상황은 마치 주화입마라고 하는 기운이상으로 오는 심각한 병증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의 삶의 한계와 함께 생긴 현상으로 생긴 하늘의 벌로 여겼지만, 사실은 김영태 씨의 수행을 빙자한 빙의에 의한 교란과 조종임을 알았다. 이 내용은 시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똑같다고 할 수 없지만 거의 같은 모양의 침해를 당한 사람이 <예술상상센터 고마>에서 같이 활동했던 김oo 씨가 있는데, 그는 아직도 김영태 씨로부터 수행의 영역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신체 특히 머리 부위에 생기는 신경의 모양 이상(자신은 모르지만 뒤에서 보면 굵게 뒷머리를 타고 오르며 귀 위로 돌아 머리를 감은 모양, 나도 당시는 그것이 조사선의 공부 방식으로 인욕을 가르치는 줄로 알았다. 왜냐하면 김영태 씨가 독맥의 모양이 뒤통수의 옥침에서 좌우로 머리를 감으며 이마로 가는 모양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한방이나 수행학의 서적에서 안내하는 독맥의 위치는 머리의 정수리를 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머리를 좌우로 감는 것은 삼독三毒(, , )에 심하게 빠져 아수라의 경계에 든 존재인 손오공을 통제하는 머리띠임을 나중에 알았다. 바른 수행에는 이유 없이 고행을 강제할 일이 아니다.)과 벌레에 물린 것으로 알았던 전신의 피부발진이 기경맥의 교란으로 신체에서 생기는 독기를 자연배출이 아닌 신경(기경맥)교란으로 강제한 독기의 피부를 통한 배출로 인한 병증이며, 당시 그의 청국장 만드는 일과 밭의 김매기 등의 고행과 간호 등의 행위 등, 김oo 씨가 진심으로 행했던 행위들이, 사실은 행하는 사람의 마음과 달리 권유가 아닌 속여서 강요한 사기행위였기 때문이다. 그 외의 구성원들과 가족도 당시에 인욕이란 명목으로까지 생활을 강요받지 않았지만 이면에서 거는 빙의대상이 되어 심신의 침해를 당하여 자아의 손상과 신체의 기운 이상이나 질병을 앓게 되었다. 그러므로 상상센터를 폐관 당시 양평 미술관에서 마주쳤던 최oo 씨도 신체가 매우 힘든 상태였으며, 대부분의 구성원이 현재도 자존감의 한계로 인해 낯을 가리는 등의 경우를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경전과 신화와 설화 등에서 안내하고 있는데, 쉬운 예로 다윗과 골리앗의 골리앗을 말한다. 기운으로 자신의 체위를 높였기 때문에 거인으로 불린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거신족도 이를 이르는 말일 것이며, 반인반수의 괴물들도 감각기관의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과도한 욕망에 빠져 살며 마의 경계에 빠진 존재들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지금 글로 적는 이 상황이 나의 주관적인 사고를 넘어 객관적인 것은, 나 뿐 아니라 타인의 의식도 같이 하며 적고 있는데, 스승과 또 다른 이들의 도 같이 하고 있으며 이는 빙의憑依가 아닌 공부하는 자의 마음인 사의寫意(마음베낌)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의식에 바탕을 두고 말하며 쓰고 있지만, 스승의 마음과 또 다른 존재들의 마음이 같이하며 르네상스 후기의 매너리틱한, 왜곡되는 현재 현상을 알아가며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때는 그가 안내한대로 인욕의 방편으로 수월치 않은 일들을 찾아서 기업의 청소나 단체식당의 설거지 등을 하며 심신을 살폈는데, 참회는 나의 본성에 바탕을 두고 바른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 행하는 만큼 이루어지지만, 이면에서 나도 모르게 강요받은 타인의 빙의는 결국 신체를 병들게 하는 것일 뿐이며, 그가 의식을 점유하고 교란하며 조종하는 등의 행위에 따라, 심층의식을 쓰지 못하므로써 생기는 현상들을 겪을 뿐이었다.

빙의로 하는 기운침해의 현상으로는 심한 경우 마치 귀신이나 들린 듯 他氣에 의한 불편을 느끼거나 디스크 등의 뼈와 신경 등의 왜곡으로 오는 증상과 비정상적인 피부질환, 급성 장질환 등의 질병에 시달리거나, 일상에선 자신의 기억이 점유당하여 읽히고 의식을 교란당하면서도, 자각력이 높은 전문수행자조차 자각이 거의 어려우므로 교란당하는 줄 모른다. 단지 일상생활이나 일 등의 삶이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장애가 있는 상황을 겪으며, 관계를 교란 당하므로 일과 삶이 어렵다고 느낄 뿐이다. 또한 꿈의 모양이 대부분 편치 않거나 심층의식을 쓰지 못하므로 정상적인 사유가 불가능하다.

또한 일상적으로 행했던 마음챙김 등의 명상을 깊이하며 체험하는 심층의 상징을 경험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상징을 노래하는 시를 표현하지 못하고 현상계의 정취에 나의 현실을 비추어 쓰는 참회시의 모양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 2년여 동안에 걸쳐 진행된, 의식 뿐 아니라 기억까지 심하게 점유당하면 정취를 읊는 것도 쉽지 않고 순간순간의 현상을 통하여 나와 사회현실을 비판적 시선으로 보는 산문이나 브레히트 식의 부조리정도의 모양으로 표현하게 된다.

 

고은 시인이 과 관련한 일로 사회에서 매장되고 있어서 평소 행위의 모양이 질책을 받을만한 일인지 모르지만, 당사자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내용이 확정도 되기 전에 미리 공표할 일도 아닐 뿐 아니라, 수행에 바탕을 둔 열린 내면에서 우러나온 노시인의 시는 정의를 체득한 자의 詩임을 확인할 수 있어서, 확언하기는 어려울지라도 만약 성희롱의 단계였다면 헤르메스로서 기운을 바르게 쓰지못하는 성의식의 도착 장애현상을 겪는 당취 김영태의 빙의(憑依)행위에 따라 심층의식이 가려진 채 표층의식을 교란당하여 행한 사례로 폭력 보다는 실수나 당시에는 암묵적 합의상태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양쪽 당사자들 뿐 아니라 피해자측을 옹호하는 분들이나 사건에 임하는 사법기관의 담당자들 모두 빙의(憑依, 凴意)로 인한 의식의 교란현상으로  조현병(타의에 의하여 조율되어 일어나는 분열적 자아의 부정현상)의 한계 속에 있기에 현실 속에서 정의(正義)를 온전하게 행사하기 어려운 현실이며, 정의(正義)란 욕망의 한계에 매이지 않고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도를 깨달아서 바른 도(道)에 들었을 때 비로소 귀신의 희롱조차도 침해할 수 없는 금강석 같은 정의(正義)를 마음안에 세우고 현실에서 행사하는 공인(公人)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은 시인의 시는 몽골의 시인 이스 돌람이나 루이스 보르헤스처럼 초월적 문학성으로 인정하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초월을 경험했거나 신화단계에 대한 선험적 사유이며 초월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표현한 신화와 서사시는 아니지만 초월영역을 경험한 사람의 현재에 대한 시선이기 때문이다.

 

신경감응과 신경 교란과 의식의 교란 등의 침해는 심층에 내린 뿌리를 마비시키는 현상이 있으므로 자신의 본래인 자존을 놓치며, 자존감의 한계와 함께 열린 마음의 한계로 인하여 실제의 견해와 사유에 바탕을 둔 사고와 생각과 말 등의 소통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서구의 르네상스 시기처럼 본래성을 찾아서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아야 하는 절실한 현재 세계에서 동북아시아 속의 남과 북이 주체적 역량을 발휘하려고 만나서 사유하며 세계에 선언해야하는 이때에, 빙의를 통한 침해와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식민지배와 그것이 내면화하여 아직도 남과 북의 대결 등 질곡의 상황을 겪고 있는 우리만족과 세계의 평화에 매우 심각한 가해를 일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