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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면 취(醉)한다. 허나 “차도 사람을 취하게 한다” (茶亦醉人). 그렇다면 취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문학적 표현이라 생각하기 쉽겠으나, ‘풍경에 취하다’, ‘인품에 취하다’, ‘인정에 취하다’, ‘음악에 취하다’ 등 취한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는 그리 적지 않다.
설명이 복잡한 한자어를 놓아두고 우리말로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우리말로 술에 취한 상태를 일러 ‘알큰하다’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맵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도 있는 이 말은 그 뿌리에서 옛 만주어와도 통하는데, 그것은 ‘아리키’(술을 가리키는 옛 만주어)를 마신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견주어 인정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는 것은 ‘끌리어 마음이 열리다’는 뜻이다. 차에 취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니, 여러 쓰임새를 가진 ‘취하다’는 말의 최대공약수는 ‘떨림’이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마음이 열리고 열림으로 말미암은 평화와 즐거움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차의 취함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복잡한 사회구조에서 그 일부분을 맡아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잘 통제하지 않으면 그 구조로부터 밀려나기 십상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튼튼한 자기 통제력은 필수적인 생존의 조건이라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의 사회라 한들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이었다. 허나 오늘날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통제력과 지난날의 사회에서 보였던 통제력은 좀 다르다. 이 통제력의 성격 차이를 굳이 나누어 부른다면 ‘거센 통제’(剛制)와 ‘부드러운 통제’(柔制)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난날의 자기 통제는 상대적으로 온유한 성격을 띠는 인격 함양의 측면을 많이 드러냈지만, 오늘날의 자기 통제는 상대적으로 억지적인 성격을 띠는 생존 유지의 측면을 많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아무튼 스스로에 대한 통제는 어떤 경우에도 필수적이다. 설령 그것이 억지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이 무너지면 사람은 어떤 존재가 될지 알 수 없다. 사람됨이 너무나도 물러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고, 사람됨이 거칠어 사회적 일탈과 인격적 파괴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성 인간행위의 원인이 이처럼 인간이 근본적으로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만,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 데서 나오는 것이라 한들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술에 빠지고 도박에 빠지고 향락에 빠지며 폭력성과 독단에 빠지는 것도 다 그런 것이리라.
그렇지만 억지적인 통제력도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순 없다. 이는 인간의 삶에 견디기 어려운 부담을 주고 결국 몸뚱이의 병으로까지 이어져 목숨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성실한 업무, 가족생활의 유지, 사회적 품위의 유지, 끊임없는 사회적 재학습 등이 병을 만들고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야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온유한 통제력과 억지적 통제력 사이에는 두 가지의 주요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몸뚱이가 부드럽게 풀려있는가 하는 차이점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으로 자기 성찰이 수반되었는가 하는 차이점이다.
온유한 통제력의 기제
차를 마시는 생활은 억지적 통제력을 온유한 통제력으로 바꾸어준다. 차 마시는 생활은 자기 성찰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과 사물을 보다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 뿐 아니라, 그 몸뚱이를 따뜻하게 만들어 온유한 상태를 유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차를 일러 ‘조금 찬 기운을 가진’ 물건으로 이야기하는데, 이는 차를 만들기 이전의 찻잎을 평하는 말일 따름이다. 조금 찬 기운을 가진 찻잎은 차를 만드는 과정, 곧 불과 만나는 과정이나 발효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 따뜻한 기운을 가진’ 물건으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완성된 차에서는 조금의 찬 기운과 조금의 따뜻한 기운이 어울림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몸뚱이에게는 따뜻함을 주고, 정신에게는 통제력을 준다. 그래서 늘 차를 마시는 사람은 극단적이기 어렵다. 온유한 가운데 통제력을 갖고 사물과 사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생각으로 차를 마신다면 문제는 스스로가 마시는 차가 스스로의 몸뚱이를 따뜻하게 해주는가의 여부이다. 사람마다 몸뚱이의 상태가 다르고 상황마다 그 상태가 또한 다르다. 또 몸뚱이를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몸뚱이의 일부 기관에 부담을 주어서도 안 될 것이다. 즉 위를 다치게 하거나 폐를 약하게 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찻물이 비록 이상적인 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함에는 합리가 필요할 것이니, 이 또한 우리가 차를 마셔야 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그 기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다음 마당의 꺼리를 삼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차를 마시고 마음은 내리고> 박현 지음 바나리비네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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