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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예술상상학교 진안  예술상상

산책하는 그림 드로잉과 사람 내면의 이야기 신화 그리고 세계의 모양을 그려보며 이타적인 마음을 키우는 김밥 만들기 등으로 이루어진 예술명상프로그램 <예술상상>전시가 수몰문화미술관(마이산 정보문화센터 2)에서 20171220일부터 1231일까지 열립니다.

전시를 여는 모둠은 데미샘학교 <예술상상>, 주천지역아동센터 <예술상상>, 부귀중학교 <자기를 고민하는 아이 사라스와띠>. 진안자활센터 청년문화사업단 <너나들이>, 전문가 강좌<사라스와띠>입니다.


예술상상서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여러 해 전 전주의 찻집 한선생님이 목화 한 송이를 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씨앗을 발라 놓고 남은 솜뭉치를 보며 마치 구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를 마시던 어느 날 문득 구름의 무게는 얼마일까 생각하다가 솜뭉치를 천칭에 올려놓고 추를 가만히 움직여 보니 우연이지만 1그램의 눈금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목화송이야 때에 따라 제각각의 크기일 테니 무게도 각각 다르겠지만 그날 받은 목화솜은 정확히 1그램이었습니다.

 만물의 기본이라고 하는 물 1입방센티미터의 무게 단위인 그램은 이외에도 프로그램, 다이어그램, 픽토그램, 애니어그램 등 대부분 객관적 기준을 나타낼 때 붙여 쓰입니다. 이렇게 여러 용도로 쓰이는 그램과 붙여 쓰는 말 중에서 프로는 어떤 의미인가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현대에 우리는 프로라는 말을 아마추어와 비하면서, 특정 분야에서 능력이 일정수준에 이르러 그 일을 통하여 소득을 구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씁니다. 이렇게 일의 능력이 일정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 분야의 기술적 능력만이 아니라 인격의 함양도 객관적 수준에 이르렀다는 말일 것입니다. 공공의 영역에서 활약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공인이 이것을 이르는 말이며 서양의 프로펫서나 우리의 옛 말인 선비 또한 같은 존재를 이르는 말일 것입니다, 인디언 신화에서 둘로 나뉜 얼굴을 한 토끼를 넘어서 만나는 존재는 이렇게 무한한 환상의 영역을 열어가는 마이스터이며, 마술의 영역으로 벽을 만들고 그 속에 안주하면 우리말의 에 속하는 트릭스터일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마당가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티티새의 꼬리라는 미셸 투르니에의 발레복 대한 표현 같은 선녀벌레들이 나타났습니다. 아주 작고 노란 매미류의 벌레들이 모습에 비해 수종을 가리지 않고 여러 수풀의 줄기에 붙어 수액을 빨고 있어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와중에도 잘 생긴 무궁화 꽃 몇 송이가 피어난 것입니다. 어렸을 적 아이들과 놀던 놀이 중에 술래가 눈을 감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외치는 사이, 여러 아이들이 다가와 마술에 걸린 술래를 꽃처럼 피우고 달아나며 놀았습니다.

 사람의 삶이 언제나 그렇듯 현재도 우리의 삶터를 환상의 영역으로 열어가려는 르네상스의 시대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피었다고 외치는 무궁화를 따라 소리 내어 봅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색은 여섯 가지 감각 중 가장 원초적이다. 유아기부터 초등 저학년 때 색감을 익히는 것은 자신을 세계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닷새간의 과정은 소리와 흐름과 간섭 등 사소하지만 자연의 기본적인 물리적 현상을 관찰하면서 물감을 활용하여 색칠을 하며 놀았다.

감각은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다. 잠재영역의 외부간섭이 방해한 점은 아쉽다. 이런 와중에도 아이들의 마음은 때 묻지 않아서 도화지에 펼치는 색깔은 아이들 마음 만큼이다. 이글을 쓰는데 한 아이가 '도깨비가 뭐래요?' 하고 묻는다. 도깨비는 보이지 않는 의식의 영역에서 간섭하는 외부 자아의 하나다.

 드로잉은 산책하는 그림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대상의 느낌을 알아차리며 그리는 선은 진정하다. 풀꽃과 나뭇가지 하나가 완전한 모양을 갖춘 것처럼 그리는 사람은 스스로 완전한 존재임을 알아간다. 드로잉은 존재가 존재를 만나 베껴내어 그리는 세계의 모습이다.

데미샘학교 전시 서문

<차와 사람의 마음이 초모룽마 였으면>

 전라북도 진안군 청소년수련관 방과후아카데미 이름은 <데미샘학교> 입니다. 십 년 전에 이곳에 와서 수련관장과 약속한 것이 대안교육과정 기획과 직접 진행하는 자의식 탐구 프로그램 <나만의 예술상상>으로 소외된 아이들의 자존감을 회복 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년 동안 진행하고 여주로 옮기기 전까지 나는 아이들을 보며 나를 보고 아이들 또한 나를 대하며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예술행위를 했습니다. 덕분에 서울과 강화에서 매 주마다 찾아갈 때 단 한 번도 지루한 줄 몰랐고 아이들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오히려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선 좀이 쑤신 적이 있습니다. 어제 올린 글 중 마지막 시편은 그 때 아이들을 만난 인연 덕분에 잠 속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었고 시도 그렇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 다시 이 곳에 와서 시기는 다르지만 십 년 전의 아이들과 같은 아이들을 만납니다.

오늘은 서로 다른 실루엣 이미지를 붙이거나 해체하며 새로운 상상을 하는 아쌍블라쥬 시간입니다. 아이들의 가정환경은 십 년 전보다 나은데 나를 통해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낮도깨비가 아이들의 자아를 불편하게 합니다. 선가 수행을 한다는 사람이, 오히려 불교 태초경 속의 중생이 라싸의 단맛에 취해 빛이었던 자신의 존재성을 잃어가듯, 타인의 기억에 취해 타인의 자아를 교란하고 자신은 도깨비가 되어 존재성을 잃어가는 욕망하는 도둑이 된 것입니다.

차를 한 잔씩 나눠 마시는 중에도 욕망하는 자의 가 움직이면 부드럽고 감성이 풍부해야 할 아이들은 자아가 거칠어집니다. 오늘은 순간 화를 냈다가 아이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십 년 전 아주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어 만난 이야기를 합니다. 학습장애를 극복하고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이 되어 여수에서 충주까지 여덟 시간을 밤 운전을 하면서 물고기를 실어다가 건강한 음식을 파는 형제가 있고, 알콜 중독에 시달리며 괴롭히던 아버지에 매이지 않고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아이와 상상하기를 좋아하던 삼남매 이야기 등 •••.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와 차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적어 올리는 것은 차와 마음 살핌이 자아를 초월하는 것인데 오히려 반대로 끌어내려 자아에 갇히게 하는 세태가 너무도 한심해서 입니다.

티벳 신화를 보니 눈의 지붕이라는 의미의 히말라야가 있고 그를 뚫고 가장 높이 솟아오른 에베레스트를 그들은 여신 '초모룽마'라고 합니다. 우리의 차와 예술로 상상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초모룽마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천지역아동센터 서문

안과 밖을 여는 놀이 꾀꼬리장난

 어렸을 적 '꾀꼬리 장난'이라는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다. 어두운 밤에 편을 갈라 숨고 찾을 때, 술래의 편에서 '꾀꼬리 좀 불러다오!' 하고 외치면 숨은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꾀꼴!‘ ’꾀꼴!‘하고 대답한다. 이렇게 들리는 소리를 따라 숨은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사는 동네이고 숨은 아이들은 정직하게 기다리다 가까이 와서라도 다시 '꾀꼬리 좀 불러다오!'를 외치면 '꾀꼴!'하고 바른 응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 둘 찾아가며 서로 안팎의 경계를 푸는 놀이는 '꾀꼴!'이라는 금빛 새의 울음소리가 열쇠였다.

엊그제 집 근처 강변을 산책하려고 강변도로에 갔더니 달팽이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지나는 차량이 뜸한 곳이긴 하지만 용케도 차량에 밟히지 않고 거의 다 건너고 있었다. 혹시 몰라 길가 풀 섶에 옮겨주고 강을 보니 강물을 거스르고 있는 작은 돌섬이 있었다.

놀이는 세계의 표현으로 자신과 세계를 하나로 여는 공부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통하여 세계를 만나던 것을 외부의 디지털기기를 통하여 만나고 있다. 이런 현실 이면의 또 다른 겹의 현실을 초현실 또는 비현실이라 부른다. 우리 내부의 경험은 따스한 마음을 동반한다. 디지털 기기를 통한 온라인게임의 경우 적대적 방식의 싸움이 주류를 이루고 이 경우 차가운 마음을 통한 상대에 대한 살상방식으로 진행된다. 또한 내부의 현실일지라도 이타적 관계가 아닌 배타적 관계를 통한 현실이라면 차가움을 통한 적대적 방식으로 발현된다.

진안 주천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예술프로그램 중에 숨바꼭질을 하며 안팎의 닫힘과 열림에 대한 생각을 한다. 우리에게 안과 밖이라는 열림(on)과 닫힘(off)의 세계는 과연 어디였는가. 지금 우리의 안과 밖은 과연 어디인가.

강변산책 중에 본 달팽이와 돌섬 같은 마음이 내부와 외부의 공간이 지평으로 열리는 꾀꼬리 소리라는 생각을 한다.

부귀중학교 <고민하는 아이 사라스와띠> 서문

앵무와 뻐꾹

 슈타이너의 발도로프 교육에서 '오이리트미'氣運의 자동발현이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기운을 돌려서 심신의 조화를 이루려는 행위로서 심신의 조화 이외에 무력으로 쓰지 않는다. 무력으로 쓴 예는 티벳의 수행자 밀라레빠가 자신의 집안을 망하게 한 사람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배워서 행했던 '흑마술'을 말한다. 밀라레빠는 후에 뉘우치고 새로운 스승을 만난 후에 대참회의 수행으로 열반을 이루었다.

현대에도 주변에는 기운을 쓰는 수행자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기운 쓰는 것을 표시내지 않고 소탈한 삶을 살아간다.

수행력이 높아지면서 생기는 심안과 영안도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나는 심안에서 의 현상이나 존재성을 보는 것은 아주 잠시 느낀 적이 있다. 그러나 몽각일여에서 상징계를 보는 호접몽은 다르다. 다의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현재성이 있어서 形以上의 지혜로 자신과 세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

선천성 맹인도 마음의 눈은 세계를 굽어보는 부찰의 그림을 그리는데. 중학생 나이가 되어 정상인 방식의 적응 프로그램으로, 보는 법을 정면의 시선으로 바꾸면 자존감이 떨어진단다.

鸚鵡앵무와 뻐꾹의 소리는 허무한 느낌이 있다.

의 현실에서 기운으로 타인에게 깃들어 의식과 말을 대신하고 자신을 보기를 타인에게 미루는, 에 빠져 초월의 지평을 기벽으로 막고 사는, 앵무새와 뻐꾸기의 삶이다.

본다는 것이 기운의 현상이고 눈인데 일상의 육안도 눈 주위의 기운이 맑아서 크게 뜨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상쾌하다. 어느 눈이 좋다고 집착 할 일일까. 능력으로 타인에게 집착 말고 자신을 밝히는 등불로 쓰면 어떤가.

청년 기업 인큐베이팅 팀 <너나들이> 서문

수레바퀴를 닮은 꽃 범부채

 자폐환자의 특징은 내면의 미세한 움직임과 바퀴를 반복해서 돌리기를 좋아한다. 또한 바퀴를 돌리듯 반복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후천적 자폐의 특징은 定智에서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聰智로 향하는 길에서 벗어나, 奸智難智를 거쳐 無智의 마음상태를 돌고 돈다.

인디언 신화에서 열린 마음의 길을 가면 마이스터가 되고 닫힌 마음 안에 갇히면 트릭스터가 된다. 그러므로 트릭스터의 마음은 내면의 집착하는 마음이 분열과 착란의 상태에서 끝없는 망상을 한다. 또한 마이스터의 마음은 정지에서 총지를 거쳐 靈智에 이르는 열린 환상의 영역이다.

이천오백 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친 마음을 펼치는 전법륜을 돌리셨다고 한다. 아마도 그분이 돌린 수레바퀴는 말 그대로 바른 말씀으로 굴린 참된 바퀴일 것이다. 현재 우리가 돌리는 바퀴가 망상 속에서 돌리는 거짓바퀴는 아닐까. 가짜 바퀴라면 그만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작은 기업을 꿈꾸며 꽃을 피우려는 젊은이들과 예술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날, 문을 여니 수레바퀴 같은 꽃이 피었다.

전문가 팀 <사라스와띠> 서문

나팔꽃

야마오 산세이는 그의 수필 "다만 나팔꽃이 피어 있을 뿐인데"에서 나팔꽃을 서양에서는 '모닝 글로리'라고 부르는데 일본에서는 '아침 얼굴'이라는 의미의 '아사 가오'라고 부른다고 했다. 우리말 얼굴얼이 드러나는 모양이라고 한다. 우리말 '나팔꽃'에서 나팔은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소리를 세상을 향해 질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

 

 

가을

 

고마리 꽃이 점점이 박힌

 

옷깃 끄트머리가 분홍으로 살짝 젖은

 

폭염을 거두는 햇살처럼 자신의 욕심을 비우는

 

나무와 벌레에게 내부의 우물을 비우게 하는

 

내 손을 잡고 흔들리며 걸어가

 

깊은 그늘에서

 

흰 눈으로 덮어주고 돌아갈

 

안될 걸 알면서도 놓으려는 손을 붙들고 싶은

 

깊고도 붉은 외투여

 

 

 

 

 

올해는 他意의 간섭으로 예술상상 수업의 명상행위가 어려웠다. 나의 자각력과 즉흥적인 조율 그리고 돕는 이의 가 없었더라면 표층의식차원의 자각행위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의 간섭은 심층의식의 활용과 그에 따른 따뜻한 마음의 소통이 어렵고, 꿈 자체를 꿀 수 없거나 악몽 아니면 만들어진 꿈을 꾸게 된다. 표층의 의식에 머무르며 상상이 어렵다.

심층의식을 열고 내부와 외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열릴 때 자연스런 마음의 산책이 일어나고 대상을 보고 그리는 선과 글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현실 여건 상 돕는 이의 의 간섭이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의 간섭도 상상하기에는 방해가 된다.

타의가 간섭한 날 다섯 어린이의 눈오는 날 표현이다 구도와 모양이 거의 같으며 그린 선은 마음이 담기지 않고 차갑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도 차갑고 소통하려 하지않고 배타적이다. 보이지 않는 감각기관 意를 점유당한 모양새다. 다른 모양의 자아가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삶을 왜곡시키는 意를 쓰는 자는 누구일까?

보이지 않는 감각기관인 를 과도하게 쓰는 현상은 보이는 감각을 과도하게 써서 생기는 부조리한 현상보다 더욱 심각하게 사회를 병들게 한다예를 들면 일본의 전체주의(천황제와 군국주의)와 이중의 자아와 가성의 목소리로 표현되는 사람의 삶, 집단따돌림(이지메) 같은 사회적 기현상 등 그리고 사회 각 분야의 가짜로 진짜를 대신하는 (가라오케 - 가짜오케스트라 등)것 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하지 않는데 이유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도 이를 닮은 에 기대는 憑依현상과 그에 따른 심층의 의식을 닫아놓고 표층의 의식에 머무는 삶의 모양을 보이고 있다.

바른 마음과 몸을 유지할 때 현실과 초현실이 서로 만나는 상상이 이루어진다. 중도에 머물며 감각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바로 써야 하겠다.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047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1145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