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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당신 손을 놓고 당신의 걷은 모습이 바라다 보이는 옆길을 따라 나란히 걷는 꿈 그 길이 지나는 곳에 있는 물 속 폐사지를 거니는. 발끝에 차이는 기와 부스러기들이 한때는 여러 그림자들을 숨겨주었고 그들을 자신 안에 유폐시키던 때를 마주하는 것이다 의자가 여전히 비어있고 물고기가 구름마냥 헤엄쳐 와서 나 여기 온 것을 반길 입맞춤     

http://news.jtbc.joins.com/html/879/NB11900879.html

 

[앵커브리핑] '상(賞) 이란 무엇인가'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이따위 것을 상장이라고! 주지나 말지!"- 영화 < 동주 >윤동주의 사촌 송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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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안현미 시인의 페이스북 타임라인 고무신 안에 심은 화초에게 부자집에서 사랑받고 잘 살라고 한 말씀에 단 댓구 입니다.

오늘 아침 메일로 온 손석희 님의 앵커 브리핑에 에 대한 말씀이었네.

현재를 사는 사람이 현재가 된 세상에서 줄 때 받을 수 있는 상을 말하는 거였네.

上 相 想 商 狀 常 床 象 尙 像 相 償 常 象

向 響 香 享 饗 珦

스승께선 상도 향도 모두 같은 것이라고 하셨으니,

마음을 열고 정수리를 열며 하늘과 통할 때를 말씀하시는 거였네

은 마음이 밝고 몸 안의 神經을 흐르는 기운이 元氣로 맑아졌을 때,

내 몸 안에서 나는 고운 향기

그때 맑고 고운 수정신을 신고 가는 곳,

시간과 공간이 일치하는 그때

그곳에 갈 수 있네.

 

초월을 꿈꾸는 신데렐라

 

그대 시인이여

 

발자욱에서 새싹이 피어나는 그림은 처음 詩를 자동기술하면서 수제책(手製冊)으로 엮은 <그림자>를 위해, 내가 처음 일러스트레이션을 시작할 무렵 노희성 님이 어느 잡지를 위해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을 기억 속에서 살려서 약화한 모양 입니다. 일본의 불교 학자 히로 사치야가 부처님과 에세이로 산책할 때 그림으로 같이 산책하면서 中道에 대한 이야기로 같이 실었습니다. 근래 4 년여 동안 鬼영태가 내게 거꾸로 붙어 다니며 집착하는 것을 스승께서 같이 하시며 지난 기억을 열어보니 <그림자> 속의 詩들을 같이 일구었던 것을 확인 하니, 세상의 모든 세상, 모든 존재가 하나일 때 詩는 초월로 넘는 경계입니다.

 

느긋하게 걷기

 

보살은 대승불교를 상징합니다. 소승불교의 대표가 출가자라면, 대승불교의 대표는 재가자여야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승불교는 출가자가 아니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승불교는 출가 지상주의불교입니다.

대승불교는 출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소승불교의 그 집착을 혐오했습니다. 집착을 미워한 대승불교가 반대로 재가 지상주의를 부르짖는다면 좀 우스운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보살은 재가자여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출가자라도 좋습니다. 상관없습니다. 누구든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모두 보살인 것입니다. 출가도 재가도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불교인은 모두 보살입니다. 보살에 대해서 반야심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여기까지 우리는 읽어왔습니다. 잠깐 해석해보겠습니다.

대승불교의 수행자는 지혜의 완성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마음에 집착이 없습니다. 집착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도 없고 일체 사물을 거꾸로 파악하거나 몽상하는 일도 없으므로 절대적인 고요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소승불교의 출가자와 대승불교의 보살은 조깅과 산책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마라톤과 산책의 차이라고 해야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마라톤은 고된 운동입니다. ‘이를 악 물고 힘을 내야 하는요소가 그 안에는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 경주를 해야 합니다. 우승하고 싶다,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소승불교 출가자의 수행도 대체로 괴로운 측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깨달음을 목표로 삼아 분발하는 면이 강합니다. 더군다나 그 깨달음은 자기 한 사람의 깨달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승불교의 수행은 마라톤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대승불교 보살의 반야바라밀의 실천은 산책입니다. 산책은 산책 그 자체가 즐거운 것입니다. 산책할 때 이를 악 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즐겁기 때문에 산책하는 것이고, 즐거워하면서 산책을 합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의 수행입니다.

대승불교의 수행은 느긋하게 걷는 일입니다. 불교는 그것을 중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중도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극단을 추구하곤 합니다. 일확천금을 목표로 한다거나 또는 이왕 나쁜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끝장을 볼 때까지될 대로 되라는 심사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극단을 피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중도는 계속 걸어가는 일이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다른 곳에 한눈 팔지 않고 죽어라 일합니다만 언젠가는 결국 어딘가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고 맙니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른 생활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즐거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 보살의 걸음은 느긋하게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즐기면서 걷는 걸음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히로 사치야 글, 이미령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