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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불교와 문화]
<페이융의 알기 쉬운 『금강경』 읽기> 코너에서는 중국의 대표적인 불경 연구가인 페이융이 불교 경전, 그중에서도 『금강경』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적으로 해석한 책,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유노북스 刊, 2016) 중에서 한 편씩 발췌해 소개한다.

생후 한 달 된 아이의 축하연에서 아기가 나중에 죽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속 아이처럼 우리 모두 앞에 놓인 진실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임금님이 벌거벗은 채 자신의 화려한 옷을 자랑하겠다며 거리를 행진할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옷을 멋지다고 찬미했다.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직 한 아이만이 자기 눈에 보이는 사실, 즉 멋진 옷 따위는 없으며,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음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축하연에서 아기가 나중에 죽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역시 단순한 진실을 얘기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진실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갖가지 축복의 말로 화려한 가상을 꾸며내고, 그 속에서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활이 아무리 요란하고 왁자지껄해도 결국에는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상태로 돌아간다. 불교에서는 이를 ‘공무(空無)’와 ‘적정(寂靜)’이라고 한다.
 결국 남는 것은 공무와 적정뿐이다. 우리가 집착하던 수많은 것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새 옷처럼 그저 환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환상에 도취되기를 좋아한다. 천진난만한 아이와 차가운 이성으로 깨어 있는 어른만이 진실을 말한다. 그 모두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부처는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죽음은 인생의 어두운 일면이 아니다. 부처의 사상이 인생의 비극적인 면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는 비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부처에게 죽음이란 ‘끝남’이 아니라 ‘올라감’을 의미했다. 죽음을 인식할 때 우리는 현실 생활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자아 해방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불교의 수행 방법 중 염사(念死)가 바로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는 것이다. 염사는 부정관보다 더 근본적인 수행법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늘 죽음에 대해 인식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불교도라고 할 수 없다.
 라마교 겔룩파 창시자인 종객파(宗喀巴)는 자신의 유명한 책 『보제도차제략론(菩提道次第略論)』에서 성불하기 위한 수행의 단계를 제시했는데, 이 중 첫 단계가 바로 ‘염사’다. 종객파는 염사란 “모든 번뇌와 악업을 깨뜨리는 망치”이며,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모든 쇠손(衰損, 허물어지고 줄어듦)의 문이고, 염사는 모든 원만(圓滿, 순조롭고 완벽함)의 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염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항상 ‘정사(定死)’를 생각해야 한다. 누구나 반드시 죽으며, 수명이 줄어들 수는 있어도 늘어날 수는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언제 죽을지는 정해진 것이 아니며, 언제든 죽을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처도 “목숨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한 번 내쉬는 사이에 있다”고 했다.
 셋째,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으며 오로지 자기 내면의 신념에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한마디로 염사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생활함으로써 속세의 이익에 대한 애욕을 떨쳐내는 것을 의미한다.
 『죽기 위해 사는 법』은 기타노 다케시의 책 제목이다. 죽음을 인식하고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은 비관적인 태도가 아니라 무한함의 시작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축복의 말로 만들어낸 낙관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만 집중하고,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부러 숨기려 한다. 태어나서 자라는 오랜 세월 동안 죽음을 똑바로 보지 않고, 두려워하거나 아주 먼 일 또는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스물다섯 살 때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죽음이 내게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며, 내 인생에서도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임을 실감했다. 몇 년 뒤 나는 또 친구가 영원히 눈을 감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때 내가 느낀 전율은 모든 이론과 설교를 초월한 어마어마한 충격이었고,  나는 어떻게든 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슬프고 비통한 감정이었지만, 그 뒤에 찾아온 것은 더 큰 해방이었다. 현실 생활의 갖가지 모습에서 해방되어 더 넓은 경지로 나아간 것이다.
 실연과도 비슷하다. 막 실연했을 때는 슬프지만, 세상에는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나를 사랑해줄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해방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라.
 그것은 결코 비관적인 삶의 태도가 아니라,
 무한함의 시작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현재의 삶이 희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