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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haeoreum 2019. 1. 8. 23:37

빛이 남긴 감정, 에이피 사진전 -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세종문화회관 전시실12월 29일~ 3월 3일 까지) 중 북한 사진 중에서

산책

 

 

 

거울이 거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는 그 거울에 착 달라붙어 거울 속으로

같이 들어갔다

길 하나가

같은 곳으로 향하는

두 길로 나뉘고 있다

 

 

1

 

당신은 스스로가 종이처럼 얇다고 했다

안을 수조차 없이 얇은 당신은

여럿의 그림자를 갖고 있어서

당신의 세상은 모든 그림자가 유효했다

내가 당신에게 포갠 채

한 세상 안으로 미끄러져 들었을 때

수레국화가 지천인 산언저리 비탈이었다

그곳에는 난장이들이 재주를 넘고 있었다

마지막 난장이가 내 앞으로 와서

재주를 넘을 때 세상은

일식에서 깨어나고 나비 하나가

하얀 선으로 날아올랐다

 

 

2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도 또 하나의 아픔이라

아픈 내 살갗 말고도

아픔이라는 번짐이

나를 안고 바람결이 되어

힘을 주었다 빼기를 반복하며

나의 떨림을 자각해 내곤 했다

몸살이 끝난 날 나에겐 오늘이고

당신에겐 기약 없어진 내일이다

 

 

3

 

폐 속에 매운 연기가 피어나는 것은

영혼이 슬프기 때문이다

영혼이 슬픈 건 풀어야 할 매듭 위에

의자 하나가 머물러 섰기 때문이다

간지럼이 아쉬움일 때 슬픔으로 가고

아픔이 고마움일 때 반가움으로 온다

나를 감싸고 스미는 아픔이여

너도 존재로다

 

 

4

 

당신 손을 놓고 당신의 걷은 모습이

바라다 보이는 옆길을 따라

나란히 걷는 꿈

그 길이 지나는 곳에 있는 물 속

폐사지를 거니는.

발끝에 차이는 기와 부스러기들이

한때는 여러 그림자들을 숨겨주었고

그들을 자신 안에 유폐시키던 때를

마주하는 것이다

의자가 여전히 비어있고

물고기가 구름마냥 헤엄쳐 와서

나 여기 온 것을 반길 입맞춤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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