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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어떤 대학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들, 마침 그들은 제 나라의 음식문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국 음식이요? 그냥 죽 늘어놓고 막 먹으면 되요.” 젊은 그들의 당연하고도 당황스런 대답이었다.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늘 아래 아무렇게나 하면 되는 것은 드물다. ‘마음 가는대로 해도 참된 약속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경지가 아니라면 말이다,. 모든 것에는 다 그 나름의 약속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음식문화는 공간예술을 중시한다. 중국의 음식문화가 음식을 내오는 과정, 곧 시간예술을 중시한다면, 한국의 음식문화는 음식을 배치하는 공간예술을 중시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간장을 북극성으로 삼고 수저를 북두칠성으로 삼으며 다른 음식들을 각각 그 성질에 따라 하늘의 별자리처럼 배치해 나가는 공간예술이 바로 한국 음식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이니, 한국인의 음식상은 곧 밥상 위에 내려온 하늘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허나 거기에도 시간예술은 결합되어 있다. 공간을 무대로 하여 음식에 수저를 옮겨가는 과정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에도 나름대로 약속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림을 상징하는 국물과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숟가락이 먼저 만나야 하고, 다음으로 자라남의 상징인 푸른나물과 상생상극의 상징물인 젓가락이 만나야 하는 등의 약속이 있는 것이다.

 

차를 마실 때도 시간문화와 공간문화의 조화는 하나의 약속이다. 그 가운데 이 어울림을 가장 뚜렷하게 상징하는 작은 물건이 바로 찻잔 또는 찻그릇이다.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찻잔이나 찻그릇은 몸통과 밑굽으로 나눌 수도 있고 안과 밖으로도 나눌 수 있는데, 여기에도 나름대로 악속이 있다. 이 약속은 그 그릇을 만들어내는 도공들의 약속임과 아울러 차를 마시는 이가 살펴야 하는 약속이기도 하다.

 

먼저 찻그릇의 몸통과 밑굽의 관계는 현상과 뿌리의 관계를 상징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차를 마실 때 차를 담아내는 부분은 몸통이지만, 차를 담아내지 못하는 밑굽이 없다면 몸통도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차를 마시거나 찻그릇을 만들던 예 사람들은 밑굽을 우주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으로 여겼고, 밑굽의 한 가운데를 북극성으로 여겼다.

 

또 찻그릇의 안과 밖은 각각 시간과 공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 차가 담기는 안쪽은 12달 또는 12()로 여겼고, 그 바깥은 자미원의 둘레를 도는 북두칠성으로 여겼다. 밑굽의 안은 음()을 상징하여 약간의 우물자리를 두었고, 바깥은 양()을 상징하여 약간의 두덩을 두었던바, 이 또한 하나의 약속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찻그릇을 일러 가마거지라 불렀는데, 그것은 바로 신기(神器)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이런 그릇은 늘 깨끗하게 다루어야 했는데, 이를 일러 설거지라 불렀다.

 

아무튼 차를 마신다는 것은 사람이 우주를 마주하는 일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차 한 잔 마시면서 시간과 공간의 어울림을 생각하고, 꽃과 뿌리의 하나됨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차를 마시는 옛 사람들의 마음길이었다. 요컨대 찻물은 그런 어울림과 하나됨의 거지에 담을만한 가장 알맞은 물 곧 신단수였던 셈이다. 그 물로 스스로를 채우고, 그 어울림에 맞지 않을 부질없는 자신을 비워가는 것이 또한 차 마시는 이의 마음가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차를 마시는 마음길과 참선에 드는 마음길이 어찌 크게 다르다 할 것인가. 말하자면 차는 사람의 마음길을 우주의 운행과 일치시켜내려는 상징물이요, 우주를 제 집으로 삼는 호연지기의 깃발이고, 집착을 비워가는 방하착심(放下着心)의 계율이자,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안내자이기도 했던 셈이다.


스승의 말씀 <차를 마시고 마음은 내리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