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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넓고 큰 강이 있습니다. 강 이편은 차안此岸이고 강 저편은 피안彼岸입니다. 불교에서는 차안을 사바라고 부릅니다. 사바는 어리석고 번뇌가 가득 찬 세계입니다. 그와 달리 피안은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번뇌의 불이 꺼진 세계가 피안입니다.

불교는 우리에게 어리석음과 번뇌의 차안을 버리고 강을 건너 깨달음의 피안에 도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도 우리에게 그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피안으로 건너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차안에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려면 무조건 피안으로 건너가야만 합니다.

차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 욕망은 종류도 매우 다양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은 욕망을 비롯하여 명예욕이나 권력욕 등등이 있습니다.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일찍 죽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참으로 얄궂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욕망은 차안에서는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망을 예로 들어 한번 생각해봅시다.

나는 가난하다. 돈이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하는 돈을 벌면 그 욕망이 해결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연봉 1천만 원을 벌던 사람은 최소한 15백만 원은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주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15백만 원의 연봉을 받게 되면 이번에는 다시 적어도 연봉 2천만 원은 벌어야지.’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연봉을 받게 되면 이번에는 3천만 원이 목표가 됩니다. 우리의 욕망은 한도를 알지 못합니다. 욕망은 언제나 점점 커져가는 법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욕망을 갈애渴愛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산스크리트 트리슈나trsna’를 옮긴 말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애타게 찾는 것과 같은 격렬한 욕망, 맹목적인 충동을 갈애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다에 표류하는 사람이 너무나 목마른 나머지 바닷물을 마시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바닷물은 절대로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은 더욱더 심해질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욕망은 그것을 충족시킨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습니다. 충족시키면 충족시킬수록 욕망은 더욱더 커져만 갑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면 결국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왕과 같은 꼴이 되고 맙니다.

디오니소스신은 미다스왕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자 미다스왕은 자기 손이 닿는 것은 전부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빕니다.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먹으려는 음식까지도 황금으로 변해버립니다. 결국 미다스왕은 디오니소스신에게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려줄 것을 간절히 청합니다. 정도를 넘어선 욕망은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미다스왕의 교훈이지요.

사바세계의 욕망은 사바세계에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안에 이르는 일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 ‘소욕지족少欲知足이 바로 피안으로 건너가는 길이 됩니다. 이 말은 욕망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녀야만 비로소 욕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바로 우리들에게 피안으로 건너가라고 외치고 있는 경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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