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用變不動本

쓰임새야 이리저리 바뀔지언정 그 뿌리는 움직이니 않나니”(用變不動本)이라는 말이 있다. 이론적으로 이 말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어떤 이가 어제는 빨간 옷을 입고 오늘은 파란 옷을 입는다고 해서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니듯이, 물들인 빛깔이야 다를지라도 또 그것이 같은 삼베옷일 수 있듯이 말이다.

 

차라고 해서 어찌 다를 것인가. 전라도 보성에서 난 찻잎과 경상도 하동에서 난 찻잎이 다를지라도 그것으로 만든 것이 어찌 근본에선 같은 차가 아닐 것이며, 봄에 난 차와 여름에 난 차도 그 뿌리를 따지자면 어찌 서로 다를 물건일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곡우 이전에 딴 찻잎을 소중하다 하고, 어떤 이는 입하 무렵의 찻잎이 그만이라 하지만, 뿌리를 살피자면 거기에 어찌 잘나고 못난 구별이 있을 것인가. 모양새가 다르고 쓰임새가 다를 뿐 근본에선 같은 차일 따름이다.

 

차나무에 대엽종이 있고 소엽종이 있다지만, 이런저런 차이를 떠나 그 근본에선 모두 같은 차나무일 터, 중국의 안시(安溪)에서 만든 철관음과 윈난성에서 만든 푸얼차가 어찌 근본이 같은 차가 아닐 것인가. 우이(武夷)에서 난 대홍포나 쓰촨의 몽정(蒙頂)도 그 뿌리에선 하나같이 차일 터, 그 하나같음에 대한 이야기도 쓰임새와 모양새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중요하다 할 것이다. 지식으로서의 차가 아니라 삶을 성찰하는 깊은 눈으로서의 차는 아마도 이런 이야기와 관련이 되리라.

 

일본의 차가 내세우는 것이 다르고 중국의 차가 내세우는 것이 다르고, 그리하여 차를 마시는 습관도 다르고 좋아하는 향과 즐기는 맛조차 다를지라도, 그것은 모두 차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것이 차라는 이야기를 삶의 중요한 영역으로 끌어들인 보람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나됨은 대체 무엇일까? 이 대답은 너무도 단순하여 아마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비움을 특징으로 하는 사랑이다. 나를 비워내고 그 빈자리에 모든 아름다움을 채워가는 그런 사랑이다.

 

어디까지 낮출 수 있는지

어리석은 이도 사는 동안 많은 분들을 만나 함께 차를 마실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누고 싶은 것은 늘 그런 사랑과 아름다움과 하나됨이었다. 허나 아름답지 못한 자리도 없지는 않았다. 일없이 목에 힘을 주고 다니시는 분들, 부질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을 하시는 분들, 좌우를 살피지 못하고 자신이 뭔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분들도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차를 좀 안다고 하시는 분들 가운데 그런 이들이 더 많았다. 감투 꽤나 쓰고 있다는 분들 가운데 그런 이들이 더 많았다.

 

대접하는 것보다 대접받는 것을 즐기시는 분들이 마시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차가 될 수 없다. 어떤 앎이 있고 어떤 경력이 있으며 이런저런 차를 마신 자리가 많았을지라도, 그 이는 단 한 잔의 차도 마신 적이 없다 할 것이다. 그 이가 마신 것은 아마도 향기롭고 빛깔 좋은 독물이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영혼을 고상함이라는 이름의 타락으로 물들이는 그런 독물 말이다.

 

모든 차가 그 쓰임새의 다양성을 떠나 하나인 것은 차가 마시는 이들의 머리 숙임 때문일 것이다. 자연을 찬송하고 옛 인물을 찬송하며 역사를 읊조리고 철학을 칭송하는 그런 머리 숙임이 아니다. 어떤 이들의 그것은 머리를 더 바짝 들고 고개를 더 꼿꼿하게 세우기 위한 예비동작일 수도 있는 탓이다.

 

차를 마시는 이들의 머리 숙임은 오로지 사람에 대해, 특히 저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머리를 숙이는 것이어야 한다. 아직 마음이 그에 미치지 못해 어설프게 고개를 숙이면서 이러 낮춤이 형식적 위선은 아닐까 여기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하나같이 머리를 숙이고 모든 이들의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차에 담긴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형식적 위선조차 하지 못하는 진심은 그 위선의 마음보다도 못한 탓이다.

 

어리석은 이가 중국 윈난성의 소수민족과 처음으로 만난 것은 계미년의 봄 청명절 무렵이었다. 보름 정도의 짧은 일정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는 길, 옥룡설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어느 마을을 찾았을 때, 그 마을 입새에서 가장 먼저 만난 이는 나이가 일흔을 훌쩍 넘었을 어느 노파였다. 옥룡설산의 골짜기처럼 주름진 자글자글한 얼굴, 그 얼굴에서 피어나는 참으로 평화로운 웃음으로 낯선 이를 반기며 나무 등걸처럼 거친 손사래를 치는 그녀에게 이끌려 그녀의 집으로 따라간 것은 마치 꿈결의 일과 같았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거듭하는 그녀의 뜻은 차나 한잔 하라는 것이었다. 허나 그 집에 차리고 할 만한 것은 떨어지고 없는 모양이었다. 난감한 노파는 이리저리 살림살이를 뒤졌지만 결국 계면쩍은 얼굴로 어리석은 나그네를 바라보며 무안하게 웃다가 부엌에서 물 한 그릇을 떠오면서 아마도 물밖에 내올게 없네라는 뜻이었을 말을 거듭했다.

 

그때 어리석은 이가 그 집에서 마신 물은 참 생명을 일깨워준다는 천일생수(天一生水)였다. 해발 35백이 넘는 두메의 샘터에서 길어온 물이니 그러할 것이고, 앞뒤를 재지 않고 나그네를 맞이하던 그 노파의 마음이 담겼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었다.

 

갑신년에도 어리석은 이는 그 물을 잊지 못해 다시 나그네가 되어 그 집을 들렀건만 노파는 이미 몸을 땅에다 두고 선화(仙化)한 다음이었다. 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해 마셨는데, 이미 그 물은 천일생수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선녀의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 집도 이미 선녀의 정갈한 움집은 아니었다. 그냥 두메의 오래된 집일 따름이었다.

 

한 해 뒤인 을유년 봄에 어리석은 이는 그 노파를 다른 곳에서 만났다. 천년의 바이족(白族) 마을이라 불리는 뉘떵(洛鄧)이란 곳에서였다. 비록 같은 몸뚱이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그녀는 같은 사람이었다. 거침없는 손 사래로 부르는 모습이며 얼굴에 얹힌 주름이 그랬을 뿐 아니라, 집을 뒤지다가 결국 물 한 그릇을 내오는 모습도 영락없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내온 한 그릇의 그 물도 천일생수였다.

 

차는 마음에서 뽑아낸 천일생수

그 마을을 들렀던 다음날, 부처님의 형상을 바위에 새긴 동굴로 이름이 난 석보산(石寶山)에 들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새 그녀는 거기에 와 있었다. 전에도 그곳을 몇 번이나 들렀건만 그녀를 보지 못하고 돌덩이만 보았는데, 그 날은 그녀를 거기에서 다시 만났던 것이다.

 

스스로의 가슴 한 가운데를 깊이도 뚫어 그곳에서 감로수를 받아내는 관세음보살의 아린 모습에 두 노파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관세음보살의 아리따운 자태와 허리가 휜 두 노파의 모습이 내내 겹쳐지고 있었다. 두 노파의 모습이 그렇게 돌로 다듬은 관세음보살로 현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노파의 얼굴이 겹쳐지는 돌로 된 관세음보살 앞에 어리석은 나그네 차 한 잔을 올리고 싶었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차를 대접하겠다던 노파들의 모습이나 깊은 가슴을 뚫어 감로수를 받아내는 보살상 앞에 이제는 거꾸로 차 한 잔을 그렇게 울리고 싶었다. 그들의 마음을 덜어 휴식을 건네고 싶었다.

 

어쩌면 참선하는 이들의 참마음은 중생을 가엾게 여기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부처의 마음과 보살의 마음을 가엾게 여기면서 그 이들의 짐을 나눠지겠다는 것이 참선으로 드는 바른 마음가짐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참으로 밝음에 대한 그리움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차를 즐기는 이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는 않을 터, 차 한 잔은 내 안에 잠든 참사람의 짐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자, 그 참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 것인가. 허나 거기에도 약속들이 있을 것이니, 그 약속이 아니면 그런 그리움인들 무슨 소용이랴.

 

그래서 차는 곧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늘, 사람과 땅이 함께 맺은 약속이다. 그 약속에 대한 되새김이다. 아마도 차에 대한 수많은 지식도 그런 약속을 되살피는 흔적이라 할 것이다. 또 그래서 늘 묻고 싶다. “차를 마시는 그대는 대체 처음에 무슨 약속을 하였는가?”


 <차를 마시고 마음은 내리고> 박현 지음 바나리비네트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