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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말

해오름 haeoreum 2018. 10. 24. 15:59


 

  

안개여

너는 온 몸으로 나를 감싸고 있어

커다란 대추모양으로

하지만 난 너를 배반 한다

나는 씨가 아니라 나무로

모양을 키우기 시작했거든

 

굵은 줄기에서 뻣뻣하게 가지를 뻗으며

지난여름의 살기를 품은 억센 가시로

 

나를 안은 너의 가슴과 목덜미와 턱과 겨드랑이

그리고 네 음부 근처 부드러운 허벅지까지,

찔릴 때 고통보다 빼는 고통이 더하도록

 

힘껏 찌르고 있어

가끔 너의 고통을 생각할 뿐,

 

나의 의도는 단 한 가지

네 살갗 속 신선한 생살과 박동하는

핏줄을 유린하고 붉은 피를 터뜨려

살과 박힌 가시의 미세한 틈으로

흘러내리게 하는 것

 

나는 네 피에 젖으며

배어나오는 핏물과 신음처럼

천천히 눈물만 흘릴 거야

 

온몸으로 감싸 나를 보호해 온 안개여

나는 이렇게 너를 배반하고 있다

 

언젠가, 배반의 가시가 녹을 리 없고

네 몸에 박힌 가시가 나 자신이라는 걸

내가 절대의 배반 자체라는 걸

알아차리거든 그날,

 

나의 아버지께도 이 말을 전해 주길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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