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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 나름대로 창조자가 된 것은 불을 쓰면서부터였으리라. 그 이전에는 사람의 삶도 크게는 다른 영장류들과 다르지 않았으니, 불을 바라보는 데서 그 중요성이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사람은 불을 이용하여 새로운 갈래의 음식을 만들었고, 새로운 갈래의 옷을 만들었으며,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던 도구들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도구들이 그런 것이라 하겠다. 최첨단 기계들과 비교적 전통적인 도구들이 빠짐없이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불을 신으로 이해하여 숭배하던 시절에 견주어, 오늘날 우리들의 이해가 정확하기는 한 것일까? 즉 불이란 여러 방법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을 수반한 에너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예를 들어 밥을 짓는 데 요구되는 일정한 열량만 충족시킨다면 그것이 어떤 갈래의 불이든 상관이 없을까? 소나무 장작으로 익혀내는 밥과 전기열로 익혀내는 밥이 같은 것일까?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불은 온도이고, 온도는 곧 열인 이상 그것은 원칙적으로 같은 것이어야 하며, 다르다고 할 경우 온도의 상승 속도나 온도의 유지범위 등이 문제될 따름이다.

 

이제 이야기를 돌려서 차를 마시는 것을 살펴보자. 우리가 마시는 차에서는 불이라는 것을 빼놓을 수는 없다. 차를 우려내는 물도 불을 거쳐서 그 온도를 얻을 수 있고, 차를 우려내는 도구들도 불의 작용 없이는 얻어낼 수 없는 것들이니, 불은 차를 마시는 일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틀이 된다 하겠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차를 일러 물과 불의 만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결코 그른 말일 수 없다. 그런데 차를 마시는 이들은 아직 불보다 물을 더 근본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에 대해 이야기되는 내용들보다 물에 대해 이야기되는 내용들이 훨씬 많을뿐더러 그 깊이도 크게 차이가 나는 탓이다.

 

그럼에도 이제 다시 차에 담긴 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차에 담긴 물의 성질만큼이나 중요하고, 찻잎 자체만큼이나 결정적인 불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차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온기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사람 자신에게도 온기는 있다. 그 성질이 뜨겁든 차든 사람에게는 모두 생명력이 있는 탓이다. 허나 그 모든 생명력이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돈을 쫓고 어떤 것은 권력을 바라보며 또 어떤 것은 이름에 매달린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사람을 보려거든 그 생명력의 강약을 보지 말고 그 생명력의 성질을 보라고 말이다.

 

참선을 한다거나 수행을 할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그 참선과 수행을 하는 이의 결기만 볼 것이 아니다. 그 결기에 대체 어떤 나무가 불이 되어 타고 있는지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참선자와 수행인이 품은 뜻이 무엇일지라도 결국 그는 자신 속에서 타고 있는 나무의 종류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 불길이 부드러운 문화(文火)이든 드센 무화(武火)이든 그 불길을 일으키는 재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따라서 차를 마시는 이는 자신이 마시는 차에 담긴 불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차에 담긴 온기의 실상을 가늠할 수 있다. 가스로 구운 차그릇과 장작으로 구운 차그릇이 다른 것도 그런 것이며 그 물을 데운 불길도 그래서 다르다 할 것이다.

마음 길을 찾는 참선자가 굳이 그 먹는 밥과 입는 옷을 살피는 것도 결국은 그런 것이니. 어찌 그런 것을 넘어서서 함부로 된 주장을 펼칠 것인가.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비록 옳은 구결일지나, 그런 주장이 참으로 옳기 위해서는 제 마음이 그런 마음인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니. 그 마음을 살핌에는 그 처음이 자신의 생명에 담긴 장작이니, ‘나의 똥나무 막대기는 대체 무엇인가.

<차를 마시고 마음은 내리고> 박현 지음 바나리비네트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