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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융의 알기 쉬운 『금강경』 읽기

<페이융의 알기 쉬운 『금강경』 읽기> 코너에서는 중국의 대표적인 불경 연구가인 페이융이 불교 경전, 그 중에서도 『금강경』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적으로 해석한 책,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유노북스 刊, 2016) 중에서 한 편씩 발췌해 소개한다.






중생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들이다. 어째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까? 자아의 상, 타인의 상, 중생의 상, 생명이 존재하는 시간의 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부처는 이 네 가지를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했다. 글자만을 놓고 보면 이 네 가지는 자아의 형상, 타인의 형상, 중생의 형상, 생명이 존재하는 시간의 형상이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자아에 대한 의식, 타인에 대한 의식, 생명에 대한 의식, 생명이 지속되는 시간에 대한 의식을 의미한다.

부처는 이런 의식들이 우리 영혼을 구속하기 때문에 자유의 경지로 들어가고 싶다면, 이 네 가지 의식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유명한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쓰는 ()’자아의식으로, ‘()’인간으로, ‘중생존재, ‘수자(壽者)’영혼으로 해석했다.

육조혜능은 이 네 가지 상을 수행자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라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능동적인 주체와 수동적인 대상, 즉 자아와 비자아를 구분하고 다른 생명을 경멸하는 것을 아상이라 하고, 자신은 계율을 지킬 수 있다고 자만하며 계율을 어긴 사람을 멸시하는 것을 인상이라고 하고, 이 세상의 고통과 윤회를 증오하여 천상에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을 중생상이라 하며, 이 세상에 오래 살고 싶어 복업을 부지런히 닦으면서 그것이 집착인 줄 모르는 것을 수자상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 외에도 여러 해석이 있고 각각의 해석이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인 사상은 같다. 이 네 가지 상이 에서부터 시작되어 인류로 확장되고, 다시 모든 생명까지 뻗어나간 다음, 최종적으로 시간의 개념이 된다. 그러므로 네 가지 상은 공간과 시간의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는 이 네 가지 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를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이라 하고, 하나로 통틀어 무상(無相)’이라고 한다.

금강경에서는 무상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상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을 형상, 특징, 현상으로 보고 아무런 현상도 없는 존재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불교의 공무(空無)’없다’, ‘허무하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이해하고 불교를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종교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불교의 없다의 의미가 아니라 경험이나 지식을 초월한 경지를 의미하며, ‘공무는 개념 이전의 상태다.

을 현상으로 해석한다면, ‘무상은 현상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사람, 나무 같은 것들을 없앨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없앤다 해도 그들의 존재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상에서 중요한 것은 상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육조혜능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다. ‘무상이란 다양한 현상에 흔들리지 않고, 대상이 무엇인지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다.

우루쥔(吳汝均)이 편저한 불교대사전을 보면, ‘무상상대적인 형상이 없고 대상의 상대상(相對相)과 차별상(差別相)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해석에는 에 대한 또 다른 의미가 들어 있다. 바로 독립적인 자성(自性,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고유한 성질이다. 그렇다면 무상이란 영원할 만큼 독립적인 자성을 가진 현상은 없다는 뜻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현상이 없다면, 어떤 현상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최고의 마음 수행 법칙이다. 바로 모든 현상에서 공성(空性)’을 발견하고,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큰 주제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싫어도 그를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를 관조하며 자신이 왜 그를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를 싫어하는 자신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누가 내게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그저 인연일 뿐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질 허망한 현상이며, 내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다.

반대로 눈앞에 있는 꽃이 아무리 향기롭고 아름다워도 그것을 영원히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인연의 결과임을 관조할 수는 있다. 그것이 천천히 시들어 사라질 것임을 안다면, 눈앞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든 꽃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차분히 바라본다면 그것에 유혹되어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무리 싫어도 없앨 수 없고,

아무리 좋아도 가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차분히 바라보면

유혹되어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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