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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불꽃의 경계

haeoreum 2017. 10. 29. 03:34


어제는 이십 년 전 살던 동숭동에서 당시 집 근처로 이사와 살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마침 '개와 돼지들의 시간' 만큼 그 어둠은 내리지 않지만은 그래도 저녁 무렵이라 명륜동 감자탕 집으로 술을 마시러 갔습니다. 술을 못하는 나는 차를 소주잔에 따르고 안주로 시켜놓은 감자탕에 밥을 먹으며 친구와 연극과 사사편집회사를 운영하는 후배 둘에게 소주를 따라 주며 모처럼 지난 이야기들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밥을 먹고 골목을 나오면서 보니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그 때만해도 살아 있던 오래된 이발소가 옆에 붙어 있던 복덕방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십 년 전 나는 사실주의 영화의 롱테이크 화면처럼 공간 속에서 시간성을 그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청년이 된 당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어린 막내 아이를 모델삼아, 이발소를 배경으로 한 그림동화를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그림동화의 내용은 내가 산이 만큼 어렸을 적에 지방도시 외곽 동네 초입의, 신작로 가에는 장사를 하는 집들이 늘어서 있고 안쪽은 농사를 짓는 시골마을에 살았는데, 머리를 깎으려고 의자 팔걸이에 빨래판을 놓고 올라가 앉으면, 거울 속으로 보이는 하얀 천을 두르고 앉은 나의 등 뒤로 열린 창 밖 풍경을, 마치 거울 너머의 풍경으로 착각을 하며 잠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곤 하던, 신작로 가에 있던 작은 이발소 풍경입니다.

내가 유년기의 오십여 년 전 그 이발소는 호리호리한 청년을 이발사로 쓰며 공상에 잠기기를 좋아하던 나를 머리 깎을 때마다 홀연히 현실 너머로 안내하곤 했습니다. 

'이발소 의자 위에서 흰 천에 싸여 잠이 들면 나는 거울 속으로 들어서고, 그 속에는 신작로가 있고 신작로에는 헌 신문을 말아 쥐고 굽은 허리로 산발을 한 채 쉬지 않고 혼잣말을 하며 지팡이를 짚으며 종일 걸어가는, 내 아버지 또래의 실성 했지만 착한 친구아버지가 있습니다. 나는 그 아저씨를 따라 가면 아무리 걸음을 빨리 해도 항상 저만큼 앞서서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아저씨는 신작로를 벗어나 집들이 모여 있는 안동네로 향해서 논들 사이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섭니다. 앞서 가던 아저씨가 논둑을 따라 방향을 바꾸면 내 눈을 벗어난 아저씨는 홀연히 사라지고 논둑엔 하늘을 향해 용솟음치듯 산발을 한 수양버들이 하나 서 있습니다.'

오십여 년 전 이발소 안에서 꿈꾸던 나만한 아이가 이십여 년 전 명륜동 골목의 정감 있는 이발소 앞에 서 있는 모습을 그리다 만 그림입니다.

그림 속의 아이는 고등학교 때 부터 한쪽 눈이 가볍게 사시가 되더니 목과 허리와 다리가 뒤틀리더니 청년이 된 지금은 머리 부위의 신경과 기로가 변형되며 힘들어 합니다. 내가 오 년여 째 같이 겪어 본 바로는 지금 아이는 눈과 기억을 타인에게 빼앗기고 자신의 의지로 사유를 하지 못하는 상황 입니다. 단지 자각력이 적어서 신체의 이상 외엔 모르고 살 뿐입니다. 아이는 명상 등의 마음과 신체의 기운 흐름을 자각할 수 있는 공부를 하지 못한 보통의 사람입니다. 나 또한 신체의 흐름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지만 무의식과 그 안에서 꾸던 꿈은 잃었습니다. 이 년 전부터는 내면을 통하여 언어로 소통할 수 있어서 신경 기로와 장부를 교란하며 신체와 정신을 병들게 하는 사람들과 그를 저지하며 돕는 사람들 속에서 상황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 안의 현상이라고 하지만 실재하는 사람들의 기운증독 속에서 일으키는 를 활용하여 가해하는, 안으로 오는 사람은 자폐 속에서 자아를 분열하고, 밖에서 몸과 정신으로 겪는 사람은 실재하지 않는 자아가 강제되는, 데칼코마니 처럼 마주한 현상 속에서 한 쪽은 외부의 세계를 현재로 살지 않고, 한 쪽은 내부의 세계를 빼앗겨 꿈이 없는 물달팽이 처럼 수면에 거꾸로 떠서 유영하는 불구의 현상입니다.

지금 나의 눈과 를 통하여 이 이야기와 이 현상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의 언어는, 실재를 부정한 공간은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실재라는 의미이고, 차원의 공간은 각자의 현실에서 어디 쯤 미끌어져 갔는가? 그 각자가 미끌어져 멀어진 거리는 얼마큼 인가? 일어난 '현재'를 가운데 놓고 둘러선 우리들이 느끼는 시간성은 어디쯤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십여 년 째 차를 마시고 명상과 참회를 통해 삶을 일으키고 심신을 되살렸는데, 불필요한 자아가 강요되고 기억과 사생활이 타인에게 빼앗긴 채 사유를 교란당하고, 신체의 신경 기로가 교란되어 강제된 기운 속에서 종일 뱉어야 하는 가래가 무슨 현상입니까?

가족 전체가, 그리고 바깥의 사람들이 겪는 이 현상은 무엇입니까?

 

밝은 공간에 불편한 글을 올려 차예사 님들 마음에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아래는 기억 속의 사내를 떠올리며 쓴 십여 년 전 졸시 입니다. 현재 우리들의 현실이 이와 같아서 염치없이 올립니다


 

흔들리는 불꽃의 경계

 

흔들리는 으로 가을이 길러지고 있다

타오르는 촛불들의 금 안에서 가을이 일렁이고 있다

불꽃의 금은 몇은 꺼지거나 몇은 자리를 옮겨

이웃의 경계를 만들며 또 다른 줄을 지어 가고 있다

미친 원가 해만 뜨면 걷고 걷던 그 길은

그에게 타오르는 불꽃이었을 것이다

그가 알 수 없게 중얼거리던 것은 그 불꽃의 경계에서 묻혀 올리던 혼자만의

잠언이었을까

어느 날 그가 辛酸한 한 그루 용 버들이 되어

논두렁에 섰을 때 그 잠언 부스러기들은

그림자가 되어 논의 벼를 쓰다듬어 기르고

초가을 새떼를 말없이 받아주다

또 어디론가 잘려나갔는데

그의 경계는 계절의 것으로 환원 되었으니 지금,

타는 불꽃의 숲속에서 조신*을 떠올린들 대수겠는가

 

*환몽설화幻夢說話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