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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신다는 것

차를 마신다는 것은 참 묘한 일 가운데 하나다. 다른 음료를 마실 때와는 달리 그 이면에 어떤 선입견이 따라다니기 일쑤다. 차를 마시는 것이 철학이나 사상 자체를 마시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며, 차를 마실 때는 어떤 정해진 의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차는 다른 음료와 달리 쉽게 마시기 어려운 음료의 하나가 되었다. 또 이미 차를 마시게 되었다 하더라도 문화적 수준이 높아 보이는 사람과 만나면 자신은 아직 차를 제대로 마시지 못한다고 겸양하기도 한다.

마치 유령처럼 붙어 다니는 차에 대한 이런 관념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끼니를 잇기조차 어렵던 지난날에도 차를 마실 수 있었던 어떤 부류의 옛사람들이 지어내고 그런 부류의 흉내를 내는 오늘날의 얼치기 문화인들의 조장해낸 편견은 아닐까? 거꾸로 차는 정말 무언가 특수한 철학이나 사상의 결정체인 것일까?

 

한국의 21세기는 그런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의 분수령인 듯싶다. 왜냐하면 21세기는 한국에서 차를 마시는 일이 대중화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차를 마시는 일에 어떤 심오한 의미가 있는 듯 보는 이가 많았고, 그 이후에는 차를 보통의 음료, 특히 잘 살자 시대를 상징하는 건강 음료의 하나로 보는 이가 많다.

 

그렇다면 새삼스레 이런 이야기를 꺼내놓은 필자의 입장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밝히자면 필자에겐 아무런 입장이 없다. 굳이 말하라면 둘 다 옳을 수도 있고, 둘 다 그를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출처를 따지자면 사람이 쓰는 모든 물건은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약간의 가공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사람에겐 아직 없음에서 있음을 만들어낼 물질적 권능이 없다. 또 그런 물건들이 어디 하나인들 철학이나 사상을 담고 있지 않을 것인가? 허나 그런 의미는 그것을 쓰는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읽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탄산음료와 마찬가지로 차가 음료의 일종일 뿐이라 여기는 사람에게 차는 다만 그런 음료일 뿐이며,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차는 하나의 화두 또는 담론의대상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앞의 부류가 뒤의 부류보다 문화수준이 낮은 것도 아닐 것이다. 차를 화두로 삼을 뿐 다른 모든 것, 특히 자신의 영혼에는 심상한 이가 있을 수 있고, 차를 평범한 음료로 여길지라도 다른 것들에서 그의 마음길을 살펴가는 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필자는 차를 다시 이야기하려 한다. 수많은 인간의 말들 가운데서 조사들이 던진 화두는 몇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또 조사들이 던지지 않은 그 많은 말들이 화두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허나 조사들의 화두가 마음길을 살피는 데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음식과 음료가 있음에도 는 마음길을 살피는 너무나도 좋은 방편이라 여기는 탓이다. 즉 필자가 보건대 차는 화두 왕이다.”

 

차를 만드는 재료를 살펴보아도 그렇고, 차를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아도 그러하며, 차의 운용성을 고려해보아도 그렇다. 또 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지난날의 문화적 업적을 감안해도 그렇다.

 

이런 점들이 곧 참선과 관련지어 앞으로 이 자리를 빌어 필자가 횡설수설하게 될 이야기꺼리들이다.

 

허나 오늘도 한 가지, 차의 이름됨은 이야기하려 한다. 그 이름에는 원래 채움이라는 뜻의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움이라는 뜻의 도 있다. 이 가운데 고요함이라는 뜻을 가지기도 하는 바, 고요함과 비움이 같은 말이고 비움과 밝음이 또 같은 말이니, 밝음이 넉넉하다면 이미 다 채워졌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차는 원래 채움과 비움의 하나됨이며 그것을 중심으로 마음길을 찾는 좋은 도구가 되어 왔다.

 <차를 마시고 마음은 내리고> 박현 지음 바나리비네트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