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불교철학 강의실 357호]열반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우리가 깨달아서 궁극의 열반에 들지 못한다면 무시無始로부터 거듭된 생사고락의 윤회가 미래에도 끝없이 진행된다는 가르침은 참으로 가혹하다. 불자들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참혹함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미국 학생들은 곧 그래도 우리가 열반으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주목하며 또 질문한다.

“고뇌의 바다에서 벗어나려면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는데, 그렇다면 열반이란 무엇입니까? 열반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것이 평안하고 환희에 가득 찬 어떤 의식의 상태를 말합니까? 열반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해야 합니까?”

당연히 물어져야 할 질문이지만, ‘열반’을 정의하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나는 좀 장황하게 설교조로 강의를 하게 되곤 한다. ‘열반’을 말로 정의하기가 일반 상식적 방법으로는 어렵고 또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열반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어 와서 그런 오해들을 모두 불식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유럽어 계통의 영어를 사용하는 내 학생들은 실은 ‘열반’을 개념적으로 쉽게 이해하는데, 오히려 동아시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개념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데 애를 먹는다. 그래서 나는 이번호에서는 내 미국학생들이 아니라 한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열반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미국식 강의를 해 보겠다.   

 

|    정의定義하기 어려운 개념 ‘열반’

우리는 ‘열반’이라는 단어로 다양한 표현을 한다. ‘열반을 얻다’, ‘열반을 성취하다’, ‘열반에 이르다’, ‘열반에 들다’ 등등. 열반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이 모든 경우에 공통된 무엇을 찾으면 될 것 같은데, 이 작업이 마음처럼 쉽지 않다. ‘열반을 얻다’라고 하면 열반이 마치 무슨 대상이어서 가질 수 있는 어떤 것 같은데, ‘열반을 성취하다’라고도 하는 것을 보면 열반이 이루고자 하는 어떤 목표가 되는 것 같다. 또 ‘열반에 이르다’라는 표현은 열반을 마치 다가가야 할 어떤 목적지로 생각하게 하고, 한편 ‘열반에 들다’라는 말은 열반이 우리가 들어가기 원하는 어떤 마음 또는 의식의 상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가 평소 쓰고 있는 이런 표현들로부터 그 표현들의 의미가 가진 공통점을 찾아 열반의 의미를 추적해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위에서 든 네 경우에조차 어떤 공통된 특성을 찾기가 어렵다. 

혹시 우리가 열반에 대해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채 이런저런 표현들을 쓰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책상 앞에 정좌하고 숨을 고르며 이 문제를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면 답이 나올까. 어떤 개념 또는 가르침에 대한 논리적 접근이 언제나 가장 적절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열반에 관한 한 그 특성(?)을 논리적으로 파악해야만 원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열반이 무엇인가를 단지 종교적으로만 접근해서는 결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이해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열반은 원래부터 논리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위에서 든 예들처럼 ‘열반’이라는 단어가 별 규칙이나 일관성 없이 사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열반에 대해서는 그 속성에 대한 어떤 긍정적 표현도 오류가 되고 단지 부정적 표현으로만 간접적으로 그 특성(?)을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에 따라 조금씩 해석이 다를 수 있겠지만, ‘열반’ 즉 ‘nirvana’라는 단어는 원래 ‘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했다. 그것이 번뇌의 불이든 욕망의 불길이든 그것이 이제는 다 타버렸거나 아니면 큰 바람이 훅 불어와 꺼져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열반’이라는 개념의 전부이다. 더 이상은 없기 때문에 여기서 더 나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여기서 열반이 가져다준다고 허위광고 되어 온 굉장하고 근사한 어떤 선물을 찾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고해苦海로 흘러가는 집착의 깊은 골로 다시 빠져 들어가게 된다. 혹자는 열반을 우리로 하여금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무상無常을 극복하는 영원불변한 평화나 환희 심지어는 열락悅樂의 상태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두 ‘열반’이라는 개념의 논리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오는 오류들이다. 


|    부정否定의 방법(The Way of Negation)

서양의 (자연)신학에서는 신神의 개념을 정의(定義, definition)하거나 신에 대해 기술하려면 부정否定의 방법(the way of negation, via negativa)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고 논리적으로 판단했다. 그보다도 천 수백 년 앞서 인도인들은 우주의 근원이라는 브라만Brahman도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정의가 안 되어 부정의 방법으로만 표현하고 가리킬 수 있다고 그들의 베다Veda에서 말하고 있다. 온 우주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온 그 어떤 근원 또는 기체는 모든 면에서 가장 위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너무나도 위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길은 없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브라만이 색깔이 있을까? 브라만은 어떤 특정한 색깔도 없다. 고정된 색깔이 있다면 브라만은 바로 그 색깔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만큼 위대성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무한히 위대한 브라만이 그럴 리가 없다. 모양도, 무게도, 촉감 등등도 모두 이런 면에서 브라만의 속성이 될 수가 없다. 그러면 브라만이 탄생하게 된 가계 족보(genealogy) 같은 것은 있을까? 브라만이 어떤 가계를 갖는다면 그것은 그런 가계를 가져야만 하게 되어 그것의 위대성이 침해된다. 그래서 브라만은 가계도 없다. 브라만은 나이도 없고, 시간이나 공간에 제약받지도 않고…. 결국 브라만은 어떤 긍정적 표현으로는 포착되지 않고 오직 부정의 방법에 의해서 ‘~는 아니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록 긍정적 표현으로 기술할 수는 없지만, 이 모든 가능한 부정적 표현이 지시하는 바의 교집합 같은 것이 브라만이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겠다. 서양 (자연)신학과 힌두교의 전신인 바라문교는 이렇게 부정의 방법으로만 가리켜지는 존재자를 신 또는 브라만이라고 불렀다. 인도에서 이 브라만은 절대적인 객관적 실체로서 온 우주의 근원이고 기체이다. 

불교의 ‘열반’도 원칙적으로 부정의 방법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불교에서는 이런 부정의 방법을 통해서 남겨지거나 가리켜진 어떤 무엇(?)이 결코 서양의 신이나 인도의 브라만처럼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실체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는 연기緣起와 공空의 가르침으로 그런 것의 존재조차 부정하기 때문이다. 브라만도 없고 아뜨만도 없다. 그리고 이 점이 불교와 다른 거의 모든 종교를 구별해 주는 중요한 포인트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철학이 그들의 가장 앞선 논증으로 겨우겨우 도달한 결론에서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결론을 뒤돌아보며 웃음 짓게 해 준다. 열심히 노력해서 갸륵하지만 아직 한 수 아래라고 보면서. 

 

|    논리와 비판적 사고

영어로 ‘Nobody loves me’라고 하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Nobody’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다. ‘There is nothing good’는 아무 괜찮은 것도 없다는 뜻이지 nothing이라는 괜찮은 something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Nobody’와 ‘nothing’은 모두 각각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이다. 내가 아는 한, 동아시아 언어로는 이들 각각을 풀어쓰지 않고 한 단어로 번역하기 곤란하다. ‘Nirvana’도 마찬가지다. 한자어 번역인 ‘열반’은 음차이지 뜻을 풀어 된 번역어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이 번뇌의 불길이 꺼져/없어져 열반을 얻었다’는 말은 모든 이가 번뇌를 더 이상 겪지 않는다는 뜻이지, 번뇌가 꺼져서 ‘열반’이라는 굉장한 무엇을 새로 얻었다는 뜻이 아니다. 석가모니가 가르침을 펼 때 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을 텐데, 그의 가르침 가운데 이런 면은 동아시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쉽게 따라가기가 어려워 보인다.  

불교의 가르침은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따라가야 이해할 수 있는데, 이렇기 때문에 불교가 다른 종교나 철학보다 어렵다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가끔 석가모니가 성불 당시 그가 이 세상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가르침을 망설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특히 그 오랜 옛날 문맹률이 99%를 넘었을 때 이런 첨예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진리를 도대체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서양에서도 불교학자들 가운데 논리와 비판적 사고에 취약한 사람들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대해 서술해 놓은 부분이 거의 없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석가모니가 그렇게 한 이유가 지극히 자명하다. ‘번뇌와 집착의 불길이 꺼진 상태’라는 부정적 표현으로 밖에 가리킬 수 없는 상태에 대해 도대체 어떤 긍정적인 표현이 가능하단 말인가. 어떤 긍정적 표현도 열반의 상태를 왜곡되게 기술할 수밖에 없으니 석가모니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러한 석가모니의 깊은 의도를 고만고만한 서양학자들이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    열반은 열락悅樂과 아무 관련이 없다

깨달아서 열반에 들면 열락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며 마치 그것이 열반의 본질인 것처럼 약장사처럼 떠벌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 있는데, 이것은 열반의 논리적 성격을 전혀 이해 못한다는 증거다. 지금까지 위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열반은 ‘번뇌의 불길이 꺼졌다’는 부정否定의 방법으로만 표현될 수 있지 ‘열락을 즐기다’와 같은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필연적으로 그 의미를 왜곡한다. 그리고 여러 문헌은 어떤 비구들이 열반에 들어 이런 열락, 환희, 찬란한 빛 같은 것들을 경험했다며 자랑스레 떠드는 것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 열반 상태에서 얻는다는 이런 굉장한 상(償, award)은 열반과는 본질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우리가 그런 ‘떡’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 집착으로 인해 번뇌의 불길이 다시금 타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경전을 통해 분명히 밝혀진 열반의 논리적 성격이 왜 동아시아에서는 괴상하게 변형되어 받아들여져 왔는지 답답하게 느끼곤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미국에 이런저런 불교가 수입될 때 많은 히피들이 그들이 ‘열락과 환희의 상태’라고 착각한 불교의 열반과 히피들이 마약을 복용하며 즐긴 환각상태를 동일시하게까지 되었다. 이런저런 마약을 섞어 ‘깨달음 알약(enlightenment pill)’을 만들겠다고 나선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 미국에 불교를 정착시킨 미국인들의 상당수가 히피였다는 불편한 진실을 책과 강연을 통해 많이 접해왔다. 

만약 어떤 이들이 열반이란 어떤 영롱한 실체로서의 참나, 참마음, 불성 같은 것들을 깨치면서 이르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최소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 아니라는 점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바라문교와 힌두교의 이야기다. 다행히 지금은 석가모니 생존 때와는 정반대로 99% 이상의 사람들이 글을 읽고 그 당시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좋은 교육도 받고, 또 넓은 세상 다양한 학문에 대해 온갖 정보를 다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차분히 앉아서, 참나, 참마음, 불성 같은 것들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좀 옆에 치워두고, 맑은 마음으로 열반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비판적으로 따져 보아야 한다. 특히 석가가 열반에 대해 언급을 자제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이해해 보려고도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스님이나 재가법사는 신도들이 좌선이나 염불하다가 묘한 기분이 든 것을 그들이 깨달아 열반을 경험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오해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홍창성  bulkwang_c@hanmail.net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